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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리어 클래스 Oct 24. 2024

사랑하는 수족을 잘랐는데 나오는 것은?!

진로이직상담사의 70일 유럽배낭여행

오래 전의 생각이다. 두려웠다.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존재의 무가치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느낀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걸, 가치 있다는 걸,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스스로 되뇌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는 나를 견딜 수가 없었다.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매일을 살아내면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머리의 앎이 심장까지 오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서강대를 계약만료로 그만두고 좋은 대학들에 입사 제의를 받지만 너무 먼 곳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출퇴근이 어렵겠다는 생각에 모두 거절한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에서 그렇게 거절할 용기가 났는지, 통이 컸다.

때마침 초등 딸아이가 심리적으로 힘든 시기였는데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설거지를 하면서 창밖을 보는데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나랑 이렇게 같이 살자.”

 “싫어요. 저는 일이 좋아요. 일하고 싶어요.”


 설거지통 앞에서 눈물을 쏟으며 기도했다. 일하지 않는 나를 사랑하기. 그리고 일을 하게 될 날을 준비한다.

스트라스부르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충실하기로 한다. 가족을 돌보고 일하느라 바빠서 못 한 ‘첼로 배우기’로 작은 오케스트라 활동에 도전하고 끊임없이 공부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엄마는 일을 안 하는데 더 바쁘지? 가족들의 평가였다.


아이들의 엄마들과 독서모임을 만들고 놀이동아리를 만들어서 학교의 아이들이 놀이를 하면서 행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면서 마음이 단단해졌고 강사로, 상담사로 다시 일을 시작한다. 프리랜서라 일을 하지 않는 날들도 있는데 그에 대해 관대해지려고 노력해 왔다.

스트라스부르의 골목길


그러다

바삐 달리던 23년 여름, 난 내게 묻는다.

아직도 일을 사랑하지. 일을 하지 못해도 네 삶을 가치롭다고 생각할 수 있니?

일을 하면서 내 마음을 볼 수는 없다. 일을 끊어야 진짜 내 마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보다 일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냐? 일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거 아냐.

그런 생각으로 나는 내게 너무 가혹해진다. 사랑하는 일들을 그만두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과감히 끊어버린다. 내 수족을 잘라낸 셈이다. 하나님, 제게 무엇을 주실까요? 아무것도 안 주셔도 저는 좋습니다.

 다시 일을 재개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D대, P대에 죄송하다 인사를 드리고 소속된 교육기관들에 당분간 강의할 수 없음을 말씀드린다. D대학은 사직서를 요구했고 서류를 쓰는데 마음이 무겁다.

K교육원에서는 처음에는 다시 돌아와서 강의하라고 했지만 나중에는 당신이 쉬겠다고 한 것이니 교육원에서 끊어낸 것이 아니라 강조한다. 맞는 말이지만 섭섭하다. 대체된 강사가 잘 해낼 테니 다시 부르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정말로 그 예감은 맞았다. 여행 가기 전에는 거의 매주 오던 강의 제의가 귀국 후에는 없어서 그동안 감사했다고 작은 선물을 보내고 아쉽지만 마무리한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희망이 싹튼다.

포르투갈에서 숙박을 예약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인스타 DM이 온다. 매 학기 S대학에 진로 강의영상을 제공하고 있는데 S대학교에서 나의 동영상 강의를 들었다며 학생이 장문의 감사글을 보낸 거다. 나의 강의로 진로고민이 해결되었다는 말과 앞으로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마음이 동그래졌다. 고무되면서 귀국하면 전처럼 다시 일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따스해졌다. 예상이 맞았다.

강의를 맡았던 P 대학에서 재임용서류를 제출하라고 이메일이 왔는데 다행스럽게도 최종 제출일자가 귀국 다음날 까지라서 안도한다.

일하던 교육기관들 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연락이 온다. 어떻게 알고 미리 연락을 주나 싶어서 감사한 마음으로 넙죽, 아무리 먼 곳이어도 흔쾌히 받았다. 혹시나 내가 일하는 센스를 잃지 않을까 싶어서 요청이 올 때마다 하겠다고 한다.

한 학기 혹은 두 달의 시간을 부재하면 프리랜서 일의 환경상 “물들어올 때 노 젓지 않으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감사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있다.

수족을 자르면 다른 무엇이 나올 줄 알았다. 그것이 비록 아무 일(work)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더라도 내게 새로운 일(thing)이 다가올 거라 생각했다. 완전히 망망대해 속에 나를 버렸는데 같은 수족이 나왔다. 할렐루야.


최근에 “다시 태어나면 무슨 일을 하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다시 태어난다는 건 기독교인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처럼 내가 좋아하는 직업상담 일을 하고 싶다고 답했다.

유럽여행의 공백기 후에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고 행복이고 축복이다.

당신과 이 글을 나누는 지금 이 순간도 기쁨이 밀려온다.

스트라스부르의 성바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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