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기 전 베트남에 갔습니다. #34

바디워시 2

by 영순

바닷가를 한참 거닐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다. 내가 처해있던 상황들, 지난 5년간의 고통, 현재의 상황, 미래에 대한 불안 그 모든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참 신기했다. 자꾸, 바디워시의 향이 궁금하다는 생각이 조그맣게 피어 올랐다.




작은 구멍 하나가 댐 전체를 무너뜨린다는 표현은 방치했던 작은 실수가 대형 사고를 일으키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쓰는데, 정반대인 내 경우에도 맞는 표현이었다. 심리학적으로는, 평온하던 마음에 작은 불안이 하나 피어오르면,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온통 마음을 검게 물들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온통 마음속에 가득하던 검은색이, 바디워시 향에 대한 기대로 자꾸 희석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발길을 돌려 호텔로 향했다. 가는 동안 이전에 품었던 불안, 분노, 초조함, 원망, 자책은 빠르게 사라졌다. 이젠 바디워시 향만 온 마음을 가득 채웠다. 이게 심리학적으로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을 위해 작은 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호텔에 들어와 서둘러 옷을 훌렁훌렁 벗고 샤워를 시작했다. 샴푸와 바디워시 역할을 함께 하는 것이라 머리부터 감았다. 내가 기대하던 향의 90%가 일치했다. 너무 시원한 향이 났다. 나머지 10%는 베트남에서만 만들법한 독특한 향이 있었다. 다행이다. 너무 뻔한 향이거나, 완벽하게 들어맞는 향보다 얼마만큼의 빗겨감은 베트남 특유의 제품의 정체성이 될테니까.




샤워를 모두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몸에서 아쿠아향이 은은하게 났다. 행복했다. 좀전에 바닷가에서 했던 어두운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마음은 온통 만족감 뿐이었다. 대단할 것 없는 이 작은 일이 이렇게 마음을 온통 채울 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 마음은 이내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팔지 않는 이 제품을 더 사용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 나는 잠들때까지, 한국에서 살수는 없는지 개인이 수입하는 루트는 없는지 등을 알아보았다. 조마조마하면서 설레는 기분이었다.




해당제품은 한국에서 따로 구하기 어려운 제품이라 유일한 방법은 가지고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귀국하는 날 나는 캐리어에 바디워시 4개를 고이 실어서 비행기에 올랐다. 아껴쓰면 1년은 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함께 가지고 말이다.




한국에 돌아와 나는 그 바디워시로 샤워를 하며 행복했던 베트남의 그 모든 날들을 기억하고 떠올리고, 콧노래를 불렀다. 연달아 모두 쓰면 행복이 빠르게 사라질까봐, 하나를 다 쓰고 나면 한국제품을 하나 쓰고, 다시 행복한 기억이 절실해지면, 다시 하나를 꺼내 쓰는 방식으로 행복의 속도를 조절했다.



치유란, 행복이란, 기대란, 만족감이란, 추억이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고, 그것으로 새롭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그것이 나에게 든든한 무기가 되어 내 마음을 오래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을, 바디워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 더 치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