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묻고, 듣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얼마 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내가 아닌 것 같은 나의 모습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에 대해 해명하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았다.
그마저도 나에겐 해명이겠지만, 그 사람에게는 변명처럼 들릴 수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해명보다는 나 역시 그런 오만 속에 빠져 살아왔던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이 타당해 보였다.
개인은 전방위 적인 상황을 버무려 자신의 상황에 대입해 이해할뿐더러,
우리가 무언가를(나를 포함해서) 객관화한다는 것 자체가 본인의 지성을 우월하게 설정하는 주관적 표현이라고 이제는 주장하고 싶다.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상대방의 진심이 무엇인지.
나의 진심이 상대에게 전해졌는지.
현재 구성원들의 상황은 어떤지.
나를 둘러싼 수많은 요소들을 모두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것을 <객관적으로 말이지...>라고 손쉽게 표현한다면
그것은 오만이자,
자기 객관화가 아닌
자기 합리화에 가깝다.
가장 좋은 해결방법은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듣고 또 듣고,
이해해 보는 것. 의견을 교환하는 것.
협조하고 합의하는 것.
그것이 더불어 산다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