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가 어쩌다 지방 미술관에?(2): 예술 분배와 경험

소련시절 널리 퍼진 작품들이 지방의 예술 감각에 싹을 틔우다

by 모험소녀

러시아 지방도시에서 감격스럽게 유명 작가의 그림을 만난 적이 있는가?

그토록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인데 지방에서도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니, 과연 러시아는 문화예술 강국이다.

지방 미술관에서도 명화를 만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앞서 19-20세기 개인의 예술품 소장 문화와 예술 대중화를 위한 기증 문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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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사연이 있을까?




3. 소련시절 예술작품의 지역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련 정부가 들어서자, 문화예술 분야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제 예술은 특권 계층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인민을 교육하는 도구로 거듭나게 된다. 훌륭한 예술작품을 접할 기회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부여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 소장이든, 기관 소장이든, 자국 예술품을 비롯해 유럽에서 사들인 작품들 모두 국가 소유로 몰수되었고, 이는 인민 모두의 것으로 규정되었다.


소련 시절의 전시 풍경(출처: bibliotih.ru, pravilamag.ru)


소련 정부는 수도에 집중된 미술관 소장품을 전국 지방도시로 계획 분산 배치했다.

현재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 박물관 및 전시 센터 로스이조(РОСИЗО)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다. 1959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공화국 문화부 산하 기관으로 설립된 로스이조의 주요 활동은 순회 전시를 여는 일, 소련 내 박물관에 작품을 분배하는 일이었다. 수년 간 50만 점 이상이 이곳을 통해 이동했다. 당시 소련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작품들은 인민 선전을 위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이 다수를 이루었을 것이다.


현재 모스크바 트레치야코프 신관에 전시된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림들


이와 같은 예술품 지역 분배의 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연해주 국립 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연해주 아르세니예프 지역 박물관에서는 이미 자체 미술 컬렉션을 보유하고는 있었지만, 별도 미술관 설립은 조금 늦게 이루어졌다.


연해주 국립 미술관(출처: tripadvisor.com)


그 시작은 1930년에 소련 교육인민위원회가 '중앙 박물관 예비 소장품의 지역 박물관 신속 배치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하면서부터였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로 예술품 이관이 우선적으로 추진되었고, 이에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러시아 박물관, 에르미타주, 푸시킨 미술관 등 중앙의 많은 작품들이 들어왔다. 이후 박물관에서 미술부만 독립하여 1966년 연해주 국립 미술관으로 정식 승인 받았다.


연해주 미술관의 첫 상설 전시, 그리고 소비에트의 연해주 미술관 정식 설립 허가 문서(출처: primgallery.com)


지금도 연해주 국립 미술관 상설전시에 익숙한 느낌의 러시아 초상화와 풍속화, 풍경화, 그리고 20세기 아방가르드 작품들이 걸려 있다. 한국에서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러시아 도시에서 유명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어서 왠지 더욱 반갑다.


연해주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들(출처: alenatour.ru, deita.ru)


나아가 더 반가운 소식. 2018년 푸틴 대통령이 자국 예술을 국가 전역에서 향유할 수 있는 문화예술 클러스터 건설 의지를 표명했다. 4개의 클러스터 조성 도시에 블라디보스토크가 포함되어, 1-2년 내 도시의 명소 독수리 언덕에 에르미타주,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마린스키 극장 분관이 소재한 박물관-극장 콤플렉스가 들어서게 된다. 물론 지금이 소련은 아니지만 이것 또한 현시대의 예술 지역 분배가 아닐지.


블라디보스토크 독수리 언덕에 공사중인 박물관-극장 콤플렉스


4. 전쟁 기간 경험한 예술적 안목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으로 인한 영향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1941-1945년 독소전쟁(러시아에서는 대조국 전쟁이라 부름)으로 이어졌다. 당시 독일과의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던 소련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중심부를 공격해오는 적군에 주요 유산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각종 핵심 산업 시설들은 물론, 국보급 예술품들을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실어 우랄 산맥 너머와 시베리아로 이전하기로 한 것이다. 그에 따라 지방으로 가게 된 예술품들은 그저 피신만 한 것이 아니라, 존재만으로 지방의 문화예술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전쟁을 피해 이송을 위해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서 내려지는 일리야 레핀의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그림(출처: lgz.ru)
공방전을 겪은 레닌그라드에서 작품을 이송해 텅 빈 에르미타주(출처: hermitagemuseum.org)


1936년 설립된 스베르들롭스크(예카테린부르크의 소련 당시 명칭) 미술관이 이런 영향을 받은 케이스다.

이곳에는 대조국 전쟁 기간 중 레닌그라드에서 이동한 에르미타주의 보물 같은 소장품들이 보관되었다. 당시 스베르들롭스크로 동행해서 온 에르미타주 직원들은 그곳에서도 전시를 열었다. 현지 사람들이 에르미타주 작품들을 경험한 이 시기를 통해서 스베르들롭스크 미술관 소장품 형성과 학술적 접근, 현지 문화생활 등에 상당한 지각 변동이 있었다.


전쟁 후 에르미타주 작품들은 트페테르부르크로 무사히 반환되었다. 박물관에서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소장품 일부를 스베르들롭스크 미술관에 기증하여 기념하도록 했다. 덕분에 현지 소장품 수준도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에르미타주에서 온 소장품을 보관했던 당시 스베르들롭스크 미술관, 그리고 현장에 건너온 에르미타주 직원들의 전시 준비 현장(출처: hermitagemuseum.org)
현재의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출처: experience.tripster.ru)


러시아 제3의 도시 노보시비르스크도 이와 같은 영향을 받았다.

대조국 전쟁 당시 건설 중이었던 노보시비르스크 오페라 극장에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주요 작품들이 실려와 보관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작품 보관에 그치지 않고, 파견된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직원들이 전쟁 중에도 전시를 수차례 개최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그림 감상의 기회를 제공했다. 시베리아 사람들은 이때 처음으로 러시아 유명 작가들의 걸작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지인들의 예술적 안목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후 전쟁이 끝나 그림은 모스크바로 돌아갔지만 명작들을 경험했던 그때의 문화적 분위기는 여전히 유지됐다. 1957년 설립된 노보시비르스크 미술관 소장품을 수집하는데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45년 완공된 노보시비르스크 오페라 극장(출처: newsib.net)
노보시비르스크 오페라 극장에 보관되고 있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그림들(좌) 그곳에서 열린 전시(우) (출처: aif.ru)


전쟁이 지나간 자리는 참담했지만, 피신하러 갔던 그 자리에는 전쟁 이후 새로운 문화의 꽃이 피어났다. 지방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몰랐던 수도의 예술적 감각과 분위기를 전쟁 기간 중에 직접 체험하게 된 결과이다. 최고의 작품을 만났을 때의 강렬한 감흥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지방에서는 당연히 안목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중앙의 예술적 감각이 그렇게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지방에 잘 이식된 셈이다.


전쟁은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지방 미술관 발전에는 아주 큰 도움이 된 시간이었을 것 같다.


1942년 전쟁 중에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열린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전시(출처: tg-m.ru)




앞서 살핀 네 가지 배경들이 섞여 러시아 지방 미술관은

자기만의 안목을 담아 소장품을 형성한 미술관으로 성장하게 된다.

지방 사람들은 명화를 소장한 미술관이 자기 동네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자랑스러울 것이다. 마치 그 그림들이 마을의 얼굴이라도 되는듯 말이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방의 명화들이 수도에 모여서 전시되기도 한다.

모스크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은 '러시아의 황금 지도(Золотая карта России)'라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1999년 시작하여 2003년 공식 승인을 받았다. 이는 지방에서 소장하고 있는 주옥 같은 명화들을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서 정기적으로 특별전으로 전시하여 모스크바 시민과 수도 방문객이 관람하도록 하는 사업이다. 수도에서 지방의 우수한 그림들이 소개되면 굳이 멀리 방문하지 않아도 현지 소장품의 특색을 한눈에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러시아 황금 지도' 프로젝트(출처: www.tretyakovgallery.ru)


결국, 문화예술 강국에서는

아무리 땅이 넓어도, 아무리 환경이 척박해도,

그 어디에서나 예술을 향유하려는 마음이 늘 있고,

그 어디에나 돌아보면 예술이 멀지 않은 곳에 늘 있다.


그래서 참, 부럽고 멋지다.


행복한 미술관

[관련 숏츠]

출처: 유튜브 채널 '여행과 사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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