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롭스키 궁전 - 러시아 고대 미술부터 19세기 전반기 미술까지
러시아 직항이 끊긴 지도 어느덧 6년이 되어간다.
가기 어려워져서 그런지 더욱 생각이 난다. 나도 수년 간 그리워만 하다 큰 맘 먹고 분위기 파악 차원에서 2년 전 모스크바에 다녀왔는데,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다녀오지 못해 지금도 아쉽다.
표트르 대제가 만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낭만의 운하 도시, 문화예술의 도시 아니던가!
새해를 맞이하여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현지 사이트(culture.ru)의 도움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박물관(Русский музей 루스키 무제이) 명화들을 따라가면서 러시아 미술과 친분을 형성해보려 한다.
러시아 박물관에 대해서는 아래 브런치북 '서랍 속 잠든 러시아 꺼내보기'에서도 일부 언급한 바 있다.
2025년은 러시아 박물관이 황제의 칙령으로 기반을 마련한 지 130년 되는 해였다. 러시아 제국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를 기리는 마음으로 설립한 이 박물관은 러시아 최초 국립 예술 박물관이 되었다.
약 45만 점의 전시품을 자랑하는 러시아 박물관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러 분관 건물들과 연합을 이루어 콤플렉스로 운영되고 있다. 그중 고대 러시아 미술부터 20세기 후반까지의 미술은 박물관의 본관인 미하일롭스키 궁전과 그 옆에 위치한 베누아관에서 만날 수 있다.
지금부터 총 4화에 걸쳐 22개 작품 중심으로 이어질 러시아 박물관 속 미술 여정은 미하일롭스키 궁전에서 시작해서 베누아관에서 끝날 것이다. 물론, 해당 방에서 원하는 그림이 없는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그림이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서, 때에 따라 특별전이나 다른 도시 순회 전시에 참석 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미하일롭스키 궁전으로 떠나보겠다.
미하일롭스키 궁전은 황제 파벨 1세가 막내 아들 미하일 대공을 위해 지었다. 미하일이 황제에 즉위하지 못하더라도 왕처럼 살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웠단다. 궁전은 건축가 카를로 로시가 설계한 후기 고전주의 양식으로, 러시아 제국의 건축 기념물이다. 이후 궁전은 국가에 넘겨졌고, 이곳에 니콜라이 2세가 자기 아버지를 위하여 '알렉산드르 3세의 러시아 박물관'을 설립해 1898년 개관했다.
러시아 박물관의 탄생은 예술을 사랑한 알렉산드르 3세의 소장품에서 출발했다. 이후 차츰 훌륭한 예술품들이 더 많이 모였고, 궁극적으로는 유산으로서 훌륭한 자국 작품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보고로 성장했다.
제국 시절부터 이어진 예술에 대한 각별함이란! 이는 결국 문화 국력으로 이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러시아 박물관의 주요 작품들을 따라가 보겠다.
관람은 연대순으로 미하일롭스키 궁전 2층(1-17번 방)에서 시작해 1층(18-54번 방)으로 내려올 예정이다.
1화에서는 인물, 그리고 인간의 삶을 담은 그림들을 만나보자.
이콘화 <금발의 천사>
(대천사 가브리엘)
러시아 미술은 이콘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콘 이전의 세속 회화가 러시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7세기 전까지 러시아에서는 화가로 활동할 수 있는 분야는 종교뿐.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은 정교회 성당의 프레스코화와 성화를 그렸다. <삼위일체>를 그린 14세기 이콘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도 수도승이었다.
여기 러시아 박물관 미하일롭스키 궁전 1번 방에 박물관의 가장 오래된 소장품 <금발의 천사> 이콘이 있다.
12세기 작품으로 작가는 알 수 없다. 이 성화는 벨리키 노브고로드에서 나타난 비잔틴 미술 학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대 시절에는 수도승들이 비잔틴 예술을 배워 이콘을 그렸고, 노브고로드, 프스코프, 모스크바, 블라디미르-수즈달 등 지역별로 이콘 학파를 형성했다.
이콘 속 천사는 달걀형 얼굴에 커다란 눈, 그리고 예쁘게 땋은 듯한 금실의 머리카락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콘화의 다른 이름은 '대천사 가브리엘'이다. 가브리엘이 가진 디테일은 고대 미술에서 위대함과 불멸을 상징한다. 세월의 흔적이 담긴 성스러운 천사 이콘이다.
루이 카라바크
<표트르 1세 초상화>
러시아는 17세기부터 황제와 일가 친척들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페르소나'로 구체적으로 모델의 특징이 드러난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 초기 실내 초상화는 이콘화의 기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초상화 속 인물은 다소 정적인 얼굴과 표정으로 묘사되는 특성을 가졌다. 전통적인 어두운 배경에 인물은 허리, 가슴 또는 어깨 선까지 그려지는데, 특별한 포인트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미하일롭스키 궁전의 5번 방에 있는 <표트르 1세 초상화>도 그런 모습이다. 검은 배경에 그려진 황제 표트르 1세는 타원형 장식 속에 들어간 듯하다. 초상화 속 황제는 그가 직접 창설하고 이끌었던 프리오브라젠스키 연대의 포병 중대 제복을 입고 있다.
이 초상화는 예카테리나 2세가 그의 동상 제작을 담당한 조각가 팔코네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림의 주인은 계속 바뀌게 된다. 이후 초상화는 다시 본국에 돌아오게 되었으나, 이를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었던 상황. 조사와 연구 끝에 초상화 저자는 표트르의 궁정 화가였던 프랑스 출신의 루이 카라바크(1684-1754)로 추정하게 되었단다.
드미트리 레비츠키
<정의의 여신 신전에 있는 입법자 예카테리나 2세 초상화>
10번 방에는 또 다른 황제의 의례용 초상화가 있다. 바로 드미트리 레비츠키가 그린 <정의의 여신 신전에 있는 입법자 예카테리나 2세 초상화>이다. 레비츠키는 18세기 후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명 초상화가이다. 그는 예카테리나 2세를 정의를 상징하는 그리스 신화 속 여신 테미스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배경에는 기둥과 난간, 화려한 실내 장식, 그 너머로 강인한 국가를 보여주듯 선박이 있다. 예카테리나 2세는 그리스식 드레스를 입었고, 쌍두독수리가 박힌 황금빛 망토를 걸치고 있다. 머리엔 왕관 대신 월계관을 썼다. 그녀는 조국의 평화를 위해 제단에 양귀비꽃을 태우는데, 타오르는 연기 위로 테미스 여신 동상이 있다. 여제의 발치에는 법전이, 그 위에는 권력을 상징하는 독수리가 앉아 있다. 범상치 않은 그림이다.
프로이센 출신의 예카테리나 2세는 남편 표트르 3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본인이 러시아 태생이 아니었으므로 통치에 대한 정당성이 늘 필요했다. 이 그림도 그녀를 신격화하는 도구로 사용했을 것이다. 이 초상화처럼 디테일을 통해 드미트리 레비츠키는 예카테리나 2세를 완벽한 정의의 여신으로, 법을 따르며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그야말로 그녀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된 결과물이다.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
<탈곡장>
미하일롭스키 궁전 13번 방에는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의 <탈곡장> 그림이 있다. 베네치아노프는 러시아 회화에서 일상의 삶을 그리는 장르를 창시한 화가이다. 19세기에는 역사화, 고대 그림, 성화 등의 장르가 아카데미 학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는데, 베네치아노프는 이러한 위계를 깨뜨렸다. 그는 소박한 농촌에서 농민들의 일상적인 모습들을 캔버스에 그려내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냈다.
베네치아노프의 <탈곡장>은 원근감과 남다른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당시 그가 에르미타주에 전시되어 있던 프랑수아 가르네의 <로마 바르베리니 광장의 카푸친 교회합창단 전경> 그림에서 영향을 받아 그린 것이라고 한다. 베네치아노프는 가르네가 사용한 원근법과 공간감을 표현한 방식에 감탄했고, 수개월을 매일 그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실제 탈곡장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정확한 표현을 위해서 자기 영지 탈곡장의 한 벽면을 톱질해내어 자연광이 나도록 작업 공간을 밝힐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다.
1824년 베네치아노프의 <탈곡장>은 황제 알렉산드르 1세에게 헌정되었다. 그리고 에르미타주에 한 자리 차지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그 값으로 작가는 3천 루블을 받았는데,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관리 평균 연봉이 약 3천 5백 루블였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값이었다. 작가의 노력과 정성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이후 작품은 러시아 박물관으로 오게 되었다.
카를 브률로프
<폼페이 최후의 날>
미하일롭스키 궁전 14번 방에 가면 대작이 있다. 카를 브률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이다. 브률로프는 예술 아카데미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은 작가였다. 아카데미 졸업 전 금메달을 받아 장학금으로 1824년 이탈리아 유학도 떠났다. 그는 고전주의적 기법과 사실에 기반한 낭만주의 주제를 모두 충족시키는 그림을 그렸다.
<폼페이 최후의 날> 그림은 브률로프가 이탈리아 유학 시절, 고대 도시의 폐허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 그는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사라진 폼페이를 방문했는데 당시, 진행 중이던 고고학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직접 로마의 역사 자료들을 조사했고, 실제와도 같은 폼페이를 스케치했다. 이를 위해 지역 주민들도 포즈를 취해 그림 속 소재가 되어주었다. 그 결과 사실에 기반한 생생한 비극이 그림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사람들 표정에서 두려움, 절망, 사랑을 지키려는 욕구 등이 읽힌다. 특별히 브률로프는 고전주의 전통에 따라, 그림의 왼편에 화구를 머리에 들고 있는 자기 모습을 그려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브률로프는 이 대작을 거의 6년 동안 그렸다. 완성된 그림은 로마, 밀라노, 파리에서 전시되었고 극찬을 받았다. 1834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간 그림은 니콜라이 1세에 선물로 전달됐고, 신 에르미타주 소장품에 올랐다. 이후 러시아 박물관 소장품으로는 1897년 옮겨졌다. 그림 크기는 무려 가로 4.5m 세로 6.5m로 압도적이다. 정말 폼페이 최후의 날을 목격하듯 생명력이 넘치는 걸작이다.
이반 아이바좁스키
<아홉 번째 파도>
카를 브률로프의 작품과 같은 공간 14번 방에 있는 명작이다. 이반 아이바좁스키의 <아홉 번째 파도>는 넘실대는 파도에 휩쓸릴 것 같은 사실적인 그림이다. 아이바좁스키는 크림 출신으로 예술 아카데미 졸업 후 유럽 여러 나라를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 소재는 대부분 바다였으므로 '해양 화가'로 알려졌다.
<아홉 번째 파도>는 놀랍게도 아이바좁스키가 현장에서 그린 게 아니라, 작업실에서 기억에 의존해 그렸다. 그는 실제로 1844년 배를 타고 가다 극심한 폭풍을 만나 배가 침몰할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조된 경험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아홉 번째 파도'일까? 아홉 번째 파도는 푸시킨, 제르자빈 등이 남긴 19세기 러시아 문학에도 자주 발견되는 표현으로, 파괴적인 힘과 치명적인 위험을 의미한다. 목숨을 위협하는 파도 위 부유물을 붙잡은 사람들, 그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아이바좁스키는 캔버스에 희망을 녹여냈다. 파도 뒤로 새로운 날을 상징하는 해가 떠오르고, 바탕은 분홍색, 하늘색, 금색 등 부드러운 파스텔 톤이 드리운다.
성난 파도는 곧 잠잠해지고 생명의 손길이 올 것을 예견한 이 그림은 에르미타주에서 구입했다. 이후 1897년 러시아 박물관으로 옮겨져 박물관 초기 소장품이 되었다.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거품까지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아이바좁스키의 그림을 보면, 그저 자연 현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인간의 의지까지 표현했으니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여기까지 미하일롭스키 궁전 2층 관람이 끝났다.
그 감동에 이어, 2화에서는 궁전 1층으로 내려가 러시아 박물관 소장 19세기 후반기 미술을 만나보겠다.
[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