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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Apr 08. 2021

그래서 글을 씁니다

나를 표현하는 즉흥적이지 않은 방법

어린 시절 나는 말하기에 자유롭지 못했다.

선명히 기억나는 건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열심히 손을 번쩍 들고 발표하는 걸 좋아했었는데,

학교라는 곳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2학년부터는 발표보다 일기 쓰는데 집중했다는 점.


말수는 줄어들기 시작했고, 어느 새 나는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학년 초가 그래서 제일 힘들었다. 친구들과 적응하고 친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신 일기는 매일 빠지지 않고 잘 써갔다. 

물론 처음은 학교 과제라 타의로 시작하게 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학년 말에 일기 노트가 무려 8권이 되어 사전처럼 두꺼워졌고, 덕분에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글을 잘썼느냐? 그건 잘 모르겠다.


쓰는 건 좋아했지만 백일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적은 별로 없었고, 

글 쓰는 걸 좋아해 문예반에 들어갔는데 시를 창작해도 다른 친구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당연하지, 그 만큼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으니!

그것이 늘 내 인생의 간극으로 남아있다.

문학적인 감각은 또 다른 것인 것 같다.


지금은 문학소녀 수준까지 도달하진 못했어도

덤덤한 감정의 글, 건조해도 잘 정돈된 글은 나쁘지 않게 쓰는 것 같다. 

글이란 게 사실 어려울 필요가 없는데. 왜 자꾸 어려워지는걸까?




글은 참 매력적이다.

말하지 않고도 자기 표현을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니 말이다.

말로 할 일을 글로 잘못 썼다가 괜한 오해가 생기기도 하지만,

반대로 글로 하면 차분하게 정리될 일인데 말로 했다가 감정으로 치닫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얼마 전 아는 분의 감정 토로가 글이 더 편한 나에게도 와닿았다. 


저는 메일로 우아하게 싸우려 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몇 마디 하다가 그만 언성이 높아졌지 뭐에요!


일단 감정이 상하면 말도 필터링이 안 되는데, 

이미 내뱉은 말이라면 어찌 주워담을 수 있겠는가.


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지만,

글로는 사람을 더 감동시킬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늘 그런 마음을 가지고 글을 써서 그런지 원체 느리다.

읽고 또 읽어보고, 오해의 여지는 없는지, 좀 더 공손한 표현은 없는지 수없이 훑어본다.

글은 말과는 달리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충분한 시간이 있다. 

그냥 내뱉지 않고도 그 만큼 만회할 기회가 있다는 거다.


그래서 말하기가 익숙하지 않았던 나에게 표현하기 가장 적절한 수단이 아니었나 싶다.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즉흥적이지 않은 방법이라,

조금 더 신중할 수 있고 정돈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글로 완벽하게 표현해 내겠는가. 

사람들이 모두 나 같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글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감정의 선이 있고, 느낌이 있고, 사람의 숨결이 있다.


전화 한 통의 힘이 그래서 큰 것인데,

우습게도 이 나이까지 아직도 나는 전화 한 통을 할 용기가 안 난다. 정말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튼 그래서 나는 글을 쓰는 것이고,

그렇게 순간을 기억하고, 사람을 생각하며, 상황을 차분하게 정리한다. 

나중에 다시 봐도 그때가 생생하게 떠오르도록 말이다.

현상되지 않은 사진과도 같다고 할까?


이러한 글들이 모여서 또 내가 되는 것이겠지.

오늘 생각의 조각조각들이 또 모여서 글이 되고, 내 삶이 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글을 써야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약간의 의무감 속에서

오늘도 이렇게 조금이라도 글을 남겨 본다.


내 이름이 각인된 펜. 지금은 자판이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펜으로 쓰는 건 좋아한다.

★ 게재한 모든 사진들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Copyright by 모험소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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