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라는 나라는 지금까지 내 삶의 중요한 순간에서 늘 전환점이 되었다. 이렇게 17년 동안이나 러시아와 인연을 이어오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처음 내가 러시아어를 접하게 된 것도, 그 나라에 매료된 것도 인생에서 엄청난 선물인 듯하다. 그만큼 삶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열 일곱에 처음 러시아어를 접한 후 스물둘 러시아 중심지를 처음으로 밟으며 문화 체험을 하고, 스물 여섯에는 다시 러시아 변두리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깊이 있는 애정이 생기면서 서른에 러시아어 학문 불을 지핀 후, 서른 셋에 되어서야 시베리아를 횡단하게 되었다.
러시아 관련 전문지식이나 특정분야에 대한 호기심보다도 나를 이끌었던 것은 ‘그냥 좋아서’라는 거였다. 나의 인생이 온통 러시아로 도배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는 그 나라에 미쳐있었던 것 같다. 러시아를 잘 모르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왜 굳이 어려운 길을 자진해서 왔는지. 그리고 왜 학생시절이 아니라 한창 일할 시기에 시베리아를 횡단하게 된 것인지. 순전히 동기는 나의 열정으로 인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이 횡단의 끝에는 기대보다 더 큰 다른 그림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접했던 무서운 나라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러시아 교환학생을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유학 다녀온 선배들이 겁을 잔뜩 줬다. 러시아에 가면 너 같은 동양 사람들은 스킨헤드(백인 우월주의자)의 공격을 불시에 받을 수 있으니 바깥에 다닐 때 조심해야 하고, 말이 안 통하면 가게 점원들조차 너를 무시할 것이며, 날씨는 춥고 밤은 길어 시간을 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가기도 전에 내게 그려진 러시아의 이미지는 ‘두려움’ 그 자체였고, 기숙사에서 맞닥뜨린 행정직원의 퉁명스러움으로부터 나는 상처 아닌 상처를 받기 시작했다. 급기야 도착한지 석 달 만에 지하철에서 여권을 도난당하면서 그 무서움은 절정에 달했다. 말도 잘 못하는데 매일같이 어두컴컴한 러시아 경찰서에 드나들며 분실 확인서 좀 달라고 애원도 했고 원망도 했다. 절대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결국 삶에 순응해야 한다는 ‘러시아의 법칙’을 따랐더니 겨우 고비를 넘겼고, 그 때부터 나름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던 것 같다. 작은 동양 여자아이가 굳어있는 얼굴의 러시아 사람에게 내민 작은 초콜릿 선물은 이들 표정의 미묘한 변화와 평소와 다른 행동을 가져왔다. 금방까지도 이러저러한 변명을 대며 못해주겠다던 서류 발급이 초콜릿 하나로 바로 해결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불만이 있어서 쌀쌀맞았던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의 여파인지 몰라도 조금만 베풀어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무서움으로 가려졌던 러시아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따뜻한 정, 그리고 관심이었나 보다. 나는 이 투박한 나라에 그렇게도 호되게 당해놓고도 미운 정이 많이 들어서인지 더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빠르게 성장하는 엄청난 나라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게 되었지만, 알고 보니 러시아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나라였다. 학생으로 체류한 2004년만 해도 인터넷을 할 만한 곳을 찾아다니고 한글 자판을 따로 설치하는 것 하나하나가 일이었다. ‘아, 이곳은 발전이 없구나. 서두르지 말자. 그냥 없는 대로 살자.’ 이런 마음으로 지냈다.
하지만 일을 하러 러시아에 다시 나온 2008년에서 2010년 무렵은 좀 달랐다. 여전히 답답하긴 했지만 러시아의 시골 극동지역에서도 조금씩 변화의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모든 서류를 수기로 작성하고 아날로그 식으로 운영되던 예전과는 달리, 디지털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러시아 사람들도 잘 적응해나갔다. 아니, 오히려 첨단 기술을 흡수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서 놀라울 정도였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모스크바
특히, 수도 모스크바는 10년 사이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입국심사를 위해 한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했던 공항에서는 최신 시설과 빠른 속도에 한 번 놀라고, 우리나라만큼이나 무선인터넷 접근성이 뛰어나 카페나 지하철 어디서든 인터넷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 한 번 더 놀란다. 길가에서 아무 자동차나 잡아타던 예전과는 달리 스마트폰으로 택시를 부르면 몇 분 만에 도착하기도 한다. 중심지를 지나면 멀리 고층 빌딩과 현대식 외관을 갖춘 첨단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잠자고 있던 러시아의 성장 잠재력이 이제야 폭발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느꼈다.
예전에 가게에서 빵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서있던 어두운 모습의 러시아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완전히 상전벽해라고 느낄 것이다. 25년(1891~1916년)의 시간에 걸쳐 시베리아 횡단열차 철로를 열고 시베리아와 극동 도시들을 정비한 대국의 민족 저력을 다시금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러시아 사람들은 사회주의 체제 아래 비어있던 그 무언가를 무섭게 채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지정학적인 위험과 서방의 압박 가운데서도 스스로 극복해나가고자 정책들을 차츰 정비해나가고 도시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대단하다. 꿈쩍도 안 하던 불곰이 지금은 주변을 살피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 최근에는 아시아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렇게도 위기 속에서도 은근한 반전(?) 매력을 보이고 있는 러시아에 어찌 빠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대국을 횡단하는 기적 같은 기회
러시아의 처음과 나중, 서부와 극동 지역만을 체험했던 나는 러시아를 더 잘 알고 싶었고,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환경은 어떠한지 계속 궁금했다. 그리고 '이 광활한 대륙이 가지는 무언가가 우리에게 비밀의 열쇠처럼 해결점 내지는 의미를 주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랜 전공자였지만 내가 알고 이야기하는 러시아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막연함을 풀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대지의 나라가 주는 의미와 진면모를 제대로 이해하려 시베리아 횡단에 대한 꿈을 펼쳐나갔다.
물론 현실에 붙잡혀 있는 나에게 회사라는 생계수단이 유일한 족쇄였지만, 전공과는 무관한 숫자놀이 업무에서 벗어나 대륙을 횡단하는 것이 내 인생에서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나의 이러한 도전과 열정은 ‘유라시아 친선특급’ 국민 원정대 선발로 이어졌고, 나는 입사 당시의 합격통보 때 기분보다도 더 기뻤다. 젊다고만 하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운 나이의 직장인이 감히 내기엔 어려운 용기였지만, 러시아가 그렇게 기적 같은 기회로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것이다.
사람을 품고 대자연의 아량을 배우다
열차여행이라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옆자리에 앉는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설렘, 멋진 창밖 풍경, 그리고 이 두 가지의 낭만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열차를 탑승한 적 있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내부가 좁고 씻기 불편한데다 풍경은 어디나 다 똑같아서 너무 기대는 하지 말라고 한다.
낭만 가득할 것으로 기대하는 열차여행
그러나 기대를 내려놓으면 뜻밖의 감사가 있는가 보다. 나는 모든 것이 좋았다. 물론 처음에는 다양한 직업의 자기만의 성격을 가진 여러 참가자들과 어색하기도 하고 좁은 공간에서 긴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을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작은 열차 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삼시세끼를 같이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가족이 되어갔다. 이렇게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고 이해관계 없이 순수한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 것이 얼마나 오랜만이던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시차가 매번 바뀌는 열차 안에서 나이를 불문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하나의 뜻으로 모인 우리는 늘 즐거움이 넘쳤다. 내가 러시아를 ‘그냥’ 좋아하게 된 것과 같은 이치랄까. 나와는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품어 나가는 여행길이었고, 그렇게 조금씩 대국의 마음을 닮아가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경이로운 자연
그뿐인가. 이해 타산적 사회에선 생각하기 어려운 인간적인 만남이 있어 신선하고, 동반자들이 좋으니 함께 보는 러시아의 풍경은 모두 한 폭의 그림이나 다름없다.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고, 강 건너 늪을 지나고 자작나무 숲과 소박한 마을을 스쳐가기도 한다. 햇빛이 만들어낸 놀라운 조명의 효과는 자연과 조화롭게 예술 작품이 된다. 끝없이 펼쳐진 시베리아 평원과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이칼 호수도 경이롭기만 하다. 대자연 속 ‘나’란 존재는 정말 티끌과도 같아서, 이제는 사소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겠노라자신을 다잡아 본다. 이렇게 러시아의 가공되지 않은 아름다움과 광활한 대지의 아량은 나를 지속적으로 이곳으로 이끌었고, 그래서 나의 이유 없는 짝사랑도 이어지는가 보다.
시대를 넘어 : 지금 우리의 고민과 조상의 아픔을 비춰준 러시아
기차를 타면 하나가 되는 우리들
열차로 대륙을 건너는 시간들은 우리 인생처럼 길게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나고 보면 한 순간이다. 그 기나긴 여정에 직접 몸을 실어보면 러시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수다스럽고 독서와 음주가 일상화되어 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열차 안에서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내기 위한 이들만의 생존 방법이다.
우리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레 러시아 사람들의 일상에 빠져든다. 열차에서 오래 머무르게 되면서 방 친구들과 맥주 한 잔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서로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쏟아내게 되었다. 특히 30대 전후 또래들로 구성된 우리 방에서는 그 나이대면 누구나 하고 있을 고민들로 분위기가 매일같이 달아올랐다. ‘과연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들과 눈앞의 현실에 대한 걱정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시원스레 해결될 수는 없는 일들이었다. 내 삶에서 항상 러시아가 전환점이 되었듯, 이들도 이번 여정이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던 것이었다.
우리에겐 여행길이지만 우리 조상들에게는 조국에 대한 고결한 의지로 이방의 땅을 밟았을 기나긴 길. 그들이 횡단하며 간 눈물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지금을 사는 우리는 현재 시대의 고민들을 나누고 있다. 이 횡단 여정이 옛날에는 조국에 돌아올 수 없는 디아스포라 동포들의 아픔이었지만, 시대를 넘어선 현재는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염려들로 바뀌어 있다. 옛날 같은 치열한 생존보다도 개인 삶의 질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된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시베리아의 혹독함과 나라 잃은 슬픔을 견디어내고 희생을 감당한 우리 조상들이 없었으면 지금 우리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한 건 시베리아를 건너는 우리들 모두는 그 당시 러시아 땅으로 건너온 독립운동가들 만큼이나 삶에 열정이 가득한 젊은이들이라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도 러시아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삶의 전환점이 되어줄 곳, 그리고 역사적 아픔이 현재의 감사로 바뀌는 매우 의미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경계를 넘어 : 아시아 건너 유럽으로 이어준 러시아
동에서 서로 갈수록 시간대가 한 시간씩 옮겨가기도 했지만 러시아 도시 외관도 조금씩 세련미를 더해갔다. 유럽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우리 여정도 이미 절반을 넘었음을 직감했다. 우랄 산맥 경계에 위치한 예카테린부르크라는 도시에서 우리는 소위 ‘유라시아 분기점’을 보며 대륙 횡단을 실감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아시아를 건너 유럽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 것이니 이 나라는 참 특별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아시아와 유럽의 특징을 모두 가지면서 이 둘을 연결하는 평화의 열쇠를 쥐고 있는 나라기도 하다. 또한 이 드넓은 땅에서 러시아인, 고려인을 비롯해 우리와 비슷한 외모의 민족, 다양한 소수 민족들 모두가 하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으니 다양함이 만들어내는 조화의 결정체나 다름없다.
유라시아 분기점에 남기고 온 소원 리본
러시아만 봐도 알 수 있듯, ‘유럽’과 ‘아시아’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경계선으로만 구분되어있을 뿐 대륙 자체는 하나다. 그렇게 우리는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했고, 러시아를 지나 국경을 건너 유럽에 이르게 된다. 물론 국경에서 열차의 바퀴를 교체하는 불편한 절차가 필요했지만, 결국 철도는 우리를 목적지까지 무사히 이끌어준 참 고마운 존재였다. 이 길이 없었다면 육로로 극동에서 유럽까지 가로지를 수 있었을까. 연결고리의 러시아만큼이나 철도도 대륙을 하나로 이어주는 소중한 수단임은 우리의 여정에서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자칫 지나칠 수 있는 엄청난 ‘의미’로 남게 된다.
다양한 인격들이 만나 이루는 하나의 작품
다름이 모여 이루는 ‘하나’,
국민원정대가 부르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긴 여정 중에 우리에게는 숙제가 있었다. 조그만 천 조각에 하나의 대륙과 통일에 대한 염원을 적고, 현지인의 소원도 여럿 담아오는 일이었다. 우리가 여행하는 러시아 도시마다 천 조각을 들고 가서 메시지를 하나씩 받아오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거부하던 현지인들도 한국과의 우정, 대륙의 평화, 개인의 행복을 기원하며 소망을 적어 내려갔다. 이러한 작은 조각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지나면서 대원들의 정성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태극기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소원들이 이어진 하나의 큰 기적이었다.
브란덴부르크 광장에서 감동을 선사한 대형 소원 태극기
이제는 러시아를 지나서 통일 상징의 종착점,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섰다. 유라시아 친선특급 원정대의 기나 긴 여정은 드디어 대형 ‘소원 태극기’로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게 된다. 브란덴부르크 광장에서 폐막 공연이 끝나갈 때 즈음 우리 대원들은 일사분란하게 태극기를 펼쳐들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열창했다. 개개인이 서로 다르고 독특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하나 되어 태극기를 붙잡고 흔들며 같은 목소리로 통일 염원을 노래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예행연습 한 번 없었다. 하지만 하나의 마음, 하나의 소리는 기적처럼 무대와 관객석 전체를 감동의 순간으로 물들어 놓았다.
이 모든 여정이 처음에는 단순히 러시아가 ‘좋아서’ 시작된 도전이었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전환점이라고만 기대했었다. 분명 나에게 러시아는 삶에서 반 이상을 차지하는 동반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지금까지는 막연한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정의 끝에서 내가 분명히 알게 된 것이 있다. 나의 러시아에 대한 애정은 진심이었고, 나 또한 러시아처럼 대자연의 아량으로 조화로움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는 것이다. 특히, 지금 세대의 고민을 넘어서서 앞으로는 러시아만이 아니라 북한을 보듬고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그런 의미 있는 일들로 내 인생의 밑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내 삶의 스펙트럼을 더 넓혀주었다고나 할까. 오랜 짝사랑 러시아가 이번 여정에서 나에게 선사한 가장 멋진 인생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