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극동의 캄차카반도에는 태곳적 자연이 살아 숨 쉰다. 문명의 이기보다 야생의 흔적이 더 많이 발견되는 청정 탐험 기지 캄차카로 떠나본다.
러시아의 머나먼 보물섬 캄차카반도
러시아는 11개의 시간대를 가진 대국이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웬만한 거리도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캄차카(Kamchatka)만큼은 예외다. 러시아에서 ‘머나먼 곳’을 표현할 때 ‘캄차카’를 대명사처럼 사용할 정도니 말이다. 실제로 오호츠크해와 베링해 사이 길게 뻗은 러시아 극동 캄차카반도까지는 철로가 연결되지 않아 항공편 이동만이 최선이다. 그래서 현지인은 캄차카를 ‘섬’이라고도 부른다. 그럼에도 천혜의 자연과 멸종 위기 동물, 거대 화산에 풍부한 자원에 이르기까지 온갖 태초의 보물이 가득한 캄차카는 찾아갈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캄차카, 탐험 기지로 시작된 곳
그렇다면 이 먼 땅에 누가, 어떻게 처음 발을 들였을까? 캄차카는 러시아 카자크(Kazak) 민족에 의해 17세기 중반 러시아령이 되었다. 하지만 마을이 형성된 건 18세기 표트르 대제 통치 시절 대륙의 끝 탐사를 시작한 이후의 일이다. 덴마크 태생의 러시아 탐험가 비투스 베링(Vitus Bering)의 탐사대가 1740년 캄차카반도에 들어왔는데, 당시 탐사선 베드로호(Saint Peter), 바울호(Saint Paul) 이름을 딴 ‘페트로파블롭스크’ 탐험 기지가 설립됐다. 지금 캄차카주 주도인 ‘페트로파블롭스크 캄차츠키(Petropavlovsk-Kamchatsky)’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비행기로 3시간 걸려 캄차카에 도착하면 공항 근처에서 곰 두 마리 동상이 맞이한다. “여기서 러시아가 시작된다”라는 문구가 적힌 동상을 배경으로 눈 덮인 코략스카야 화산(Koryakskaya Sopka)과 아바친스카야 화산(Avachinskaya Sopka)이 펼쳐진다. 이때가 캄차카에 와서 화산을 처음 보는 순간일 것이다. 빼어난 자연경관과 야생 동식물의 명성으로 캄차카의 화산군은 199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다. 화산만 300개, 그중 29개가 활화산에 속한다.
이처럼 화산이 밀집한 것은 캄차카반도가 유라시아판과 태평양판이 만나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화산과 빙하, 간헐천, 온천, 호수 등 대자연의 걸작이 빚어지고 있다. 유라시아 활화산 중 7,000년 된 최고 고도의 클류쳅스카야 화산(Klyuchevskaya Sopka, 4,750m)은 최근 300년간 50회의 분출 기록을 세웠는데,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 매년 고도가 상승 중이다.
화산의 생명력을 체험하고 싶다면 출입 허가를 받은 현지 여행사를 통해야 한다. 캄차카는 대부분 지형이 험준하고 국가가 관리하는 보호구역이라 헬리콥터나 개조한 특수 SUV, 군인 차량 등 특별한 이동 수단으로만 진입할 수 있다. 특히 7~8월에 헬리콥터를 타고 방문하면 좋을 생생한 화산 명소가 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캄차츠키 북동부 크로노츠키 자연보호구역(Kronotsky Nature Reserve)의 간헐천 계곡(Valley of Geysers)으로, 마치 지구의 태동을 보듯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곳이다. 멀리 보이는 설산과 푸른 언덕 사이로 흐르는 계곡, 기포를 뿜어내는 뜨거운 샘과 도처에 피어나는 수증기, 지옥탕처럼 끓어오르는 진흙 구덩이까지,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캄차카’라는 태고의 무대에서 끊임없이 숨 쉬고 있는 자연을 만난다.
화산 트레킹 후 온천에서 지친 몸을 풀어야 할 차례다. 가공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간직한 캄차카의 법칙은 온천에도 적용돼 시설 대부분이 자연을 해치지 않는다. 야생 속 노천 온천을 즐기고 싶다면, 헬리콥터를 타고 날리체보 자연공원(Nalychevo Nature Park)으로 향하자. 화산에 둘러싸인 이곳은 200여 개 샘이 하천을 이루는데, 온천은 탁 트인 야외 자연탕으로 즐길 수 있다.
최대 75℃에 달하는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눈앞에 펼쳐진 캄차카의 풍경을 감상하며 마음까지 쉬어 가는 시간은 그 자체만으로 신선놀음이다. 특히 온천수에 함유된 규산, 비소, 붕소 등 각종 미네랄 성분은 심혈관계·근골격계·신경계 질환과 타박상, 상처 등 피부 치료에 효능이 있다고 하니 생명의 물이나 다름없다. 전설에 따르면, 동틀 무렵 날리체보 온천에 몸을 적시며 첫 햇살을 받은 사람은 건강과 아름다움, 영원한 젊음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러시아는 우리에게 ‘불곰국’으로 익숙하다. 그런 러시아 불곰의 12~15%가 캄차카에서 서식 중이다. 불곰이 가장 많이 사는 캄차카반도 남부의 쿠릴 호수(Kuril Lake)에는 1,000여 마리가 살고 있다. 화산 폭발로 형성된 담수호인 쿠릴 호수는 수심 316m로 캄차카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며, 태평양의 대표적 연어 산란지이기도 하다. 수많은 연어가 이곳으로 유입되는 7~9월에는 불곰들이 먹이를 찾으러 모여든다. 이 시기가 현지인에게는 불곰 사냥 성수기이고, 여행자에게는 불곰 관찰의 최적기인 셈이다. 사람들은 멀찌감치 숨죽이며 이들을 지켜보는데, 불곰은 보통 시력이 좋지 않아 인기척을 못 느낀 채 평소대로 행동한다. 호수에서 연어를 잡아 입으로 낚아채거나, 새끼 곰을 돌보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불곰 주변을 날아다니는 태평양갈매기, 참수리, 검독수리 등 희귀 조류 친구들도 덤으로 보게 될 것이다.
캄차카 바다는 자연의 볼거리로 가득하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캄차츠키는 태평양 함대의 본거지 아바차만(Avacha Bay)을 끼고 있다. 바로 여기서 시작하는 해양 보트 투어는 제법 멋진 코스로 손꼽힌다. 먼저 태평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나란히 우뚝 솟은 삼 형제 바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원래는 사람이었던 삼 형제가 잦은 해일을 온몸으로 막아 마을을 구해내자, 이에 분노한 바다의 신이 이들을 돌로 만들어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전설 때문인지 몰라도 그 자태가 유난히 의연해 보인다. 삼 형제 바위를 지나 태평양 문턱 즈음에 다다르면 선상에서 킹크랩, 성게, 광어 등 캄차카산 해산물을 직접 낚아보는 일도 놓칠 수 없는 재미다. 우리가 즐겨 먹는 킹크랩이 러시아어로는 ‘캄차카 게(Kamchatsky Crab)’인 것을 보면 출신은 속일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아바차만에서 베링해 방향으로 러시아 최대 해양 보호구역인 사령관섬(Commander Island)으로 간다. 청정 지역인 사령관섬은 바다사자와 물개, 해달 등 각종 해양 포유류의 서식지로, 도착하기 수십 킬로미터 전부터 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매끈하고 둥근 몸으로 물 흐르듯 헤엄치거나, 돌 위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바다사자에게서 지상 낙원의 여유가 느껴진다. 또 사령관섬 수역에는 20여 종의 고래가 서식하고 있어 1년 내내 고래의 명품 유영도 볼 수 있다. 집채만 한 범고래가 점프를 하고 물기둥을 뿜어 올리는 모습이 캄차카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직접 목격한 이들에게는 뜻밖의 기쁨으로 다가온다. 천혜의 바다가 전해주는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