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버지의 웃음
아버지, 나의 아버지...
뉘엿뉘엿 황금빛 해가 넘어갈 때 논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마중 가는 길,
붉은 노을빛을 바라보며 어린 손가락을 펴면 실핏줄과 뼈마디가 말갛고 발갛게 보였다.
아버지의 실루엣이 붉은빛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면 나는 달리기 시작한다.
두 손을 번쩍 들고 오는 아버지의 검은 움직임이 점점 크게 다가온다.
아버지의 체취가 느껴지고 아버지의 손길이 내 겨드랑이에 들어오는가 싶다가
나는 순식간에 하늘을 날아 사뿐히 아버지의 목을 안장 삼아 무등을 탄다.
나의 까륵까륵거리는 웃음소리와 아버지의 '으싸 으쌰' 장단 맞추는 소리가
집으로 돌아오는 농로를 따라 퍼진다.
멀리 시골집의 굴뚝에 연기가 올라가고 구수한 밥 짓는 냄새가 온 동네에 가득 차온다.
나의 어릴 적 시골에 살던 그때,
가장 눈물 나게 아름답고 아득한 그리움의 기억이다.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군내에서 꽤나 먹고사는 집의 셋째 아들이었고 의병을 일으킨 선비 고경명 장군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큰 분이었다. 중지주 정도는 되었고 소작을 주어 농사를 관리하셨다.
나 어릴 적만 해도 부모님이 가진 농토가 우리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외양간의 소는 몇십 마리는 되었다.
증조부는 돌아가실 때까지 갓을 썼는데 특별히 공부를 많이 하신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증조부는 장 손자인 아버지가 농사를 돌보지 않고 객지로 공부하러 나가 늘 그것이 못마땅해하셨단다.
그래서 학비 한 번을 안 대주시니 아버지는 새벽 신문배달, 서울역 리어카 짐 나르기 등을 하면서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장손자가 이제나 저제나 시골로 내려오길 기다리던 증조부는 드디어 작은 손자 편에 편지를 들려서 서울에 있던 아버지에게 다녀오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몹시 위독하니 광채는 집으로 내려와 집안일을 수습하도록 하라'
아버지는 중고등학교를 늦게 진학해서 20살이던 그 해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할아버지 위독하시다는 편지에 그예 내려오게 된 아버지는 공부하기 위해 다시는 학교로, 그리고 서울로 돌아가지 못했다. 20살 늦가을에 결혼하고 10년을 농사짓다가 못다 이룬 공부를 자식들에게 시키기 위해
서울로 이주할 때까지는...
나의 아버지는 11살에 당신 아버지를, 13살에 당신 어머니를 병으로 잃었다.
증조부는 우리의 증조모가 병으로 먼저 떠나시자 재혼을 하셨다.
증조모조차 재혼해서 오신 분이라 고아가 된 아버지에게 따뜻하게 감싸주고 이해해 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나의 할머니는 30대 중반, 젊은 나이에 13살, 10살 어린 아들 둘을 두고 돌아가셨다.
그때 아버지는 집안에 있는 이불솜을 다 뜯어서 할머니 온몸의 피부에서 터져 나오는 피고름을 닦고 짜는 데 사용했다고 했다. 나의 아버지의 우울과 외로움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마저 병들어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숨어 울기만 할 뿐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으로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아버지는 슬프고 암울했던 기억으로 얼룩진 고향을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고도 말하기도 했다.
궁금했다.
왜 아버지가 당신의 학업을 마치러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는지,
왜 결혼하고 시골에 10년이나 눌러살았는지 말이다.
어느 날,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얘기를 하던 중 내 의문에 대한 뜻밖의 답을 찾게 되었다.
나는 그때 한참 인간의 발달과 성장 그리고 심리문제 등에 관심이 많아져 심리학을 공부하던 때였다.
"결혼하고 첫날밤 지나고 새벽에 말이다, 문득 잠이 깼는데, 네 아빠가 세상에 숨죽여 울더란 말이지. 그걸 보고 나도 어린 새색신데 말 걸기가 부끄러웠지. 새 신랑이 왜 우는가 싶어 궁금했지만 가만히 자는 척하다 어둑한 새벽이 눈에 익숙해져 갈 때, 잘 자고 일어난척하며 잘 잤냐고 말을 걸었지. 그랬더니 아빠가 이러는 거야. '나 이렇게 따뜻하고 편안하게 방바닥에 등 대고 자본 적이 없어.' 하는 거야. 지겹게 고생한 거 같았어. 그때 네 아빠가 부모 없이 어린 나이에 타지에서 고학하느라 얼마나 춥고 외로왔을까 싶었다. "
나의 아버지는 20살 나이에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한번도 접해볼 수 없던 여자 사람의 부드럽고 따뜻한 살을 맞대었을 테니, 그래서 그 감각기억이 당신의 세포에, 그리고 몸에 각인이 될 때까지 당신의 삶을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신혼의 단꿈이라기보다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따스함으로 다가왔을 거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게 12년을 당신의 적성과 성정에 맞지 않는 농사를 짓느라 어머니와 투닥거리며 자식 여섯을 낳고 시골에서 사셨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가르쳐야 한다며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해서 살면서도 자주 고향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마치 고향을 처음부터 좋아하고 그리워했던 것처럼 말이다.
나의 아버지는 50세에 되던 해, 위암수술을 받았고, 그로부터 3년 후,
암세포가 골수로 전이되어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53세 12월, 추운 겨울 어느 날, 당신의 고생스러운 이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새벽 4시, 어머니와 우리 다섯 남매는 함께 아버지 임종을 지켰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호흡을 내쉬며,
'어머니...'
나는 분명히 '어머니'하는 소리를 들었다.
놀라웠고 의아했지만, '우리 아빠 드디어 당신 어머니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으로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33년을 살았고 나는 25년을 함께 살았는데,
당신의 어머니와는 불과 13년 밖에 살지 못했는데,
'어머니'
마지막 숨과 함께 돌아가신 당신 어머니를 불렀다.
나는 두고두고 아버지의 마지막 그 한 단어 '어머니'를 되뇌며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지막 한 마디로 53년 그의 인생이 어떠했을지 이해했고 삶의 무게가 가늠이 되었다.
아버지의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숨어 우는 울음, 눈물...
몸과 마음이 채 자라지 못한 소년에게 남겨진 무서운 세상,
우리 할머니는 세상 풍파를 겪을 어린 아들을 두고 어찌 가셨을까...
어린 아들 둘을 두고 가는 할머니 마음이 얼마나 애달팠을까...
한 번도 얼굴을 뵌 적이 없는 우리 할머니는 저승에서 당신의 아들을 마중 나왔을 것이다.
'아이고 내 새끼, 얼마나 그동안 고생했느냐, 이리 와 어미랑 밥 먹자.'
눈물로 달려와 두 팔 벌려 아들을 안아주셨을 것이다.
나 어렸을 적 아버지의 라디오 사랑은 대단했다. 논일을 하실 때든, 집에 오시는 농로에서든, 저녁 먹고 사랑방에 계실 때든 어디서든 라디오를 틀어 놓으셨다.
나는 일찌감치 두 살 어린 동생의 태어남으로 3살 무렵부터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아버지의 팔베개를 하고
잠이 들곤 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랫가락에 맞춰 아버지의 장딴지 위에 다리를 올리고서는 발장단을 치며 유행가를 따라 부른다. 지금도 가사를 다 외워서 부를 수 있는 그때의 아버지와 함께 부르던 노래들,
'여덟 시 통근길에 대머리 총각, 오늘도 만나려나 떨리는 마음, 시원한 대머리에 나이가 들어~~'
'나는야 흙에 살리라, 흙에 살리라~~~'
아버지와 나는 장단을 맞추며 함께 노래를 부른다.
고음을 내지르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수염 거친 빰을 내게 비비며 간지럼을 태우고 커다랗게 하하 웃으신다.
들판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나를 보고,
학교 다녀오는 길에 논에서 일하는 ‘아버지‘ 목이 터져라 부르는 나를 보고,
사랑방에 동네 어른들이 모여 새끼를 꼬며 막걸리 한잔을 하면서 노래하라 시키면
상위에 올라가 조그만 몸을 흔들며 유행가 노래를 불러대던 나를 보고,
아버지는 커다란 이를 보이며 그 밝고 환한 웃음을 보여 주곤 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그 커다란 웃음을 본 것은 내가 대학교 3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큰 외삼촌 환갑잔치가 있었고 손님들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나는 꼰대들 분위기 맞춰주고 싶지 않아 한쪽 구석에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여대생! 노래하나 불러 봐라."
여대생이라니 모두의 눈이 구석에 있는 나에게 꽂혔다.
'아침이슬'을 불렀다. 환갑잔치에서.
분위기에 맞지도 않고 요즘 말로 '갑분싸'한 노래를 불렀다.
내가 노래 부르는 동안 집안 어른들은 끼리끼리 잡담을 하고 내 노래에 집중하지 않았다.
내가 노래를 마치자,
"내 딸이요, 내 큰딸!"
나의 아버지는 거기 모인 어르신들을 둘러보며 크게 말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보았던 그 환한 커다란 웃음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안아주었다.
아버지의 커다란 웃음은 나의 어린 시절의 보석처럼 빛나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의 그 커다란 웃음은 나만 본 듯하고 나만 기억하는 듯하다.
제삿날 모여서 아버지를 추억하는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다섯 살 많은 오빠와 동생들의 기억에는
아버지의 커다란 웃음에 대한 기억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아버지의 차갑고 음울한 모습보다 따뜻하고 밝은 모습을 기억하고 싶은 나의 바람이
그 추억들을 붙잡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오늘따라 아버지, 많이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