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머니의 트라우마치유를 위해, 그리고 오빠의 명복을 빌며...
초록 물결이 춤추는 논은 그 해 풍년을 예고하는 듯 풍요로웠고 미풍은 평화로왔단다.
하얗고 고운 비단옷을 입은 예쁜 아이는 체구가 작아 맞는 목관이 없었다.
그냥 보자기에 싸듯 비단옷을 입혀 아비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 어미와 식솔 몇이 눈물을 훔치며 따라갔다.
어머니는 아침나절부터 가야지 가야지 하며 나설 것처럼 하다 나서지 못하고 주저앉기를 수십 번..
새끼 잃은 어미를 누가 쉬이 재촉이나 했을 것인가.
"여름 해에 오래 머물면 안 되아야, ㅉㅉ."
뜨거운 여름해를 탓하는 누군가의 채근으로 어미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나섰다.
미리 올라가 구덩이를 파고 기다린 산지기는 일찌감치 가버리고 없었다.
나의 작은 오빠는 그의 나이 만 4살에 어미 품에서 죽었고, 나의 어머니는 둘째 아이를 잃었다.
나는 양력 3월 29일 봄생이다.
개나리 노랗게 피는 봄 중의 봄날 태어났다.
위로 7살, 4살 아들 둘이 있고 딸이 태어났으니 증조부, 아버지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었고 어머니는 출산노고에 집성촌인 일가친척에게 많은 인사를 받았단다. 때는 감자, 단배추, 열무, 호박, 고추 등을 심는 밭농사철이라 어머니의 잔손길이 많이 가는 때였지만 첫딸 탄생에 이웃들의 밭농사 도움이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갓 태어난 나를 보고 떡두꺼비 같은 딸이라고 했다. 정말 자라면서 외탁을 한 나는 눈두덩이가 튀어나와 눈부위가 떡두꺼비처럼 두툼하게 되었지. 두 오빠들이 꼬물꼬물 한 나를 어루만지며 이뻐했는지 어쨌는지 들은 말은 없지만 아마도 신기해하며 가만히 만져보고 둘이 키득 키득대지 않았을까 상상할 수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나에게 둘째 오빠의 죽음에 이른 과정을 들려준 적이 있지만 오빠가 갓난쟁이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내가 태어난 지 1년 몇 개월이 지날 무렵, 둘째 오빠는 4살 아기로 죽었다.
둘째 오빠는 여느 날처럼 형 따라다니며 시골 동네어귀 방죽에서 미꾸라지도 잡고 연잎으로 우산도 쓰며 놀았다. 어느 날, 방죽가에서 놀다 갑자기 사라졌는데 방죽 진흙탕 깊은 곳에 빠진 것을 큰오빠가 보고 소리를 질러 허우적대는 아이를 동네어른이 건져 올렸다. 온몸의 진흙을 씻어내고 놀랬나 싶어 기응환을 구해 먹였더니 밥도 먹고 잠도 잘 잤단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하루하루 아이가 시름시름하더란다.
아이가 클라고 그러나 싶었는데, 증조모께서 아이를 위하는 마음에 닭을 잡아 갖은 한약재를 넣고 푹 고아 죽을 쒀 점심 나절에 먹였다고 했다. 잘 먹고 잠에 들었던 아이는 혼절한 채로 발견되었고 읍내 병원에 갔지만 이미 아이는 싸늘했다. 그가 방죽에 빠지고 불과 2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고 세상에 나온 지 4돌이 지나고 몇 달이 될 무렵이었다.
어머니의 행주치마가 유난히 눈부셨다. 눈부심을 피해 치마 속으로 아늑한 온기와 그윽한 빛 속에 들어 가고 싶었다. 마당가에서 이불빨래 너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행주치마에 매달리다 들추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축축하고 거친 손바닥이 나의 빰을 후려쳐 나는 마당에 나뒹굴었다.
"저리 가서 놀아!"
언제부턴가 어머니를 보기만 하면 눈을 떨구게 되었다.
말을 몇 마디 섞다 목이 메고 눈이 매워졌다. 숨쉬기 어려워 씩씩대면 쏘가지 낸다고 질책했다.
어머니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따질 수도 없었다.
아무리 어려도 어머니의 고생이야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땅이 많은 증조부 덕분에 먹고사는 것은 풍족했으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지런한 삶은 고단한 일상이었다.
논농사, 밭농사에 외양간에 소 몇십 마리 소꼴베어 삶고 먹이며 다섯 남매 걷어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기를 반복하는 고단한 삶은 끝날 것 같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영유아기 기억은 내가 두 돌 조금 지난 무렵 갓 시집온 작은 어머니의 기억으로 전해졌다. 아무리 감각적 기억을 되살리려 해도 어머니의 품이 기억나지 않았다. 안기거나, 머리카락을 쓸어주거나, 팔베개로 재우거나, 그럴 때의 촉감, 냄새와 같은 감각적 기억이 없다. 말하자면 어머니와의 몸기억이 없다.
나는 왜 어머니를 어색하는지, 가까이 있으면 왜 긴장하고 신경이 곤두서는지 알 길이 없었다. 왜 내 가슴 한편에 죄책감과 수치심이 주된 감정으로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어떤 손짓, 어떤 몸짓, 어떤 말과 어조도 나의 귀에 마음에 거칠게 들어왔고 폭력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느끼는 자신을 자책하면서 나는 어쩌면 어느 누구의 사랑도 받을 수 없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이 세상에 별 쓸모없을지도 몰라,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을 거야'
초등 고학년부터 쓰기 시작한 나의 비밀일기장은 매일 이런 글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10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내가 왜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하지?'
어머니의 트라우마를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되었다.
내가 어미가 되어서도 한참이나 지나 알게 되었다.
새끼 잃은 어미가 살아있는 다른 새끼에게 눈길을 돌리기 어렵다는 것을...
살아있는 새끼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어미의 삶은 죽지도 못하고 고통이 이어진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나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데 나의 시간을 보냈고
어머니는 당신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온 생을 통해 몸부림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 오빠의 죽음에서 이어지는 나의 존재와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나서야
비로소 나는 해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 오빠의 명복을 빌 수 있는 마음자리가 생기게 되었다.
'삼가 오빠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