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사랑한 시간 그리고 잊음의 유예기간
1. 우리의 5년
대학 1학년 가을. 너를 알게 된 계절.
처음 너희 과 선배를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도 알게 되었고 그 무리들 중 동갑이었던 우리는 좀 더 자주 대화를 하고 티키타카가 맞으면서 자연스럽게 '나 너 좋아해.', '너 나 좋아해?' 상황이 되었고 9월 어느 밤 우리 집 앞 계단에 앉아 가로수 아래서 입을 맞추며 흔히 말하는 '연인'이 되었지. 서로에게 처음인 그 연애는 서툴고 모호했고 순수했고 한편으로는 격렬하게 서로를 흔들었어. 사랑이란 걸 제대로 동등하게 멋지게 주는 법은 모르고 상상으로만 그렸던 미지의 세계라 그랬을까. 우리는 그 불덩이 같던 감정을 손에 잘 잡지도 못 하고 동동거렸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하면 엘리멘탈의 엠버와 웨이드 같기도 했다! 너무 다르고 꿈을 향해 달려가기도 해야 했고 그러면서 끌리는 감정을 잘 표현하기가 버거웠던. 그 삐걱 거림들 속에서도 제법 멋진 일들은 많았지.
기억해? 기록적인 유성쇼가 있을 거라던 어느 새벽. 중앙도서관 뒤뜰에서 새벽 2시 잠을 쫓기 위해 커피캔을 홀짝이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유성들이 떨어지는 걸 봤던 날? 그 순간엔 이 세상에 우리 밖에 없는 것처럼 행복해했고 유성을 보며 빌었던 소원은 하나였어. 영원히 우리 함께 하게 해 주세요.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유성쇼가 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시리게 맑던 하늘과 우리가 떠올라.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화이트데이였어. 난 공강 시간 친구들과 학식을 먹으러 이동 중이었고 넌 전화를 했지. "xx관 앞이야." 너는 다급하게 그 앞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고 금방 간다고 했지. 친구들에게 잠시만 같이 기다려 달라고 하며 길 끝을 바라보고 있었어. 인파들 중에 보였던 너의 잰걸음과 흔들거리던 커다란 선물꾸러미. 무엇보다 나를 발견하고 상기된 너의 얼굴과 반짝이던 너의 눈빛이 그날의 봄햇살보다 더 따스하고 멋졌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지만 누구보다도 의식하며 사탕과 초콜릿, 곰인형, 꽃이 든 엄청나게 큰 바구니를 주고는 쿨한 척 사라진 넌 진짜진짜 귀여웠어. 남들 앞에서 그런 거 못하는 내향인인데 날 위해서 큰 용기 낸 걸 알아서 거대했던 선물보다 너의 결심에 한 번 더 반했던 날. 날 이 정도로 사랑한다고?? 꺄아.
공부량 많고 빡세기로 유명한 학과에 재학 중이던 넌 그때도 시험 기간이어서 잠도 못 자고 공부를 하는 중이었지. 그리고 우리는 무슨 일 때문인지 냉전 중이었어. 대판 싸웠던 기억이 나. 이후 난 심한 몸살에 걸려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였지만 굳이 먼저 아프다고 연락을 할 상황은 아니어서 그냥 쉬고 있었지. 보통은 나갈 힘이라도 있었을 텐데 그날은 정말 아팠어. 아무리 싸워도 며칠씩 연락을 안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나에게 하루종일 연락이 없자 네가 먼저 문자를 했지. 그래도 좀 사귀었다고 느낌이라는 게 있었던 걸까. 아무렇지 않게 틱틱거리며 대답을 했지만 뭔가 이상했는지 전화를 했지. 그리곤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 다급했던 네 목소리. "증상이 어떤데? 응. 응. 알았어. 잠깐 기다려 봐." 오래된 기억이지만 정확히 그 날은 토요일 저녁이어서 약국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았을 때였는데 넌 학교 주변 약국들을 모두 들러 어찌 약을 구해 택시를 타고 우리 집으로 달려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어. 문을 열자 보이던 사색이 되어 있던 너의 얼굴. 시험이 코 앞인데 시간 뺏은 게 미안하기도 하고 역시 너밖에 없어란 생각이 들면서 냉전이고 뭐고 고마움에 네 목을 꼬옥 감싸 안아 주었지.
그토록 서로를 미치도록 사랑했지만 그게 독이 되어 사소한 걸로 싸움이 시작되면 정말 토 나올 만큼 극단적인 말들로 서로를 할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널 잃고 싶지 않다며 너무 사랑한다며 화해를 하는..말 그대로 지지고 볶고 '미쳤거나 혹은 사랑하거나 무한궤도'를 돌았었지. 모든 구질구질한 유형의 사랑싸움이란 건 죄다 한 후 이제 우리에게 헤어짐을 고해야 한다고 느꼈어. 사랑한다면서 서로를 갉아먹고 있구나. 소중한 시간들 마저도 모두 사라질 것 같아 멋진 안녕을 고해야 했어. 세상에 그런 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잘 헤어지고 싶었달까. 결국 헤어지자는 나와 헤어질 수 없다는 너의 팽팽한 대치 중에 나는 변칙을 쓰고 말았어. 졸업 후 내가 다른 지역으로 취업을 해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장거리 연애가 시작된 상황이었고 마침 네가 실습으로 나를 만나러 오기 힘든 기간을 틈타 전화로 이별을 고했지. 미안해. 헤어지자. 그리고 네게서 오는 수십통의 전화를 받지 않았어.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마 뜬 눈으로 지새고 첫 차를 타고 온 너. 출근 전에 나를 만나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했지. 그때의 나는 이미 이 사랑의 기한이 다 된 사람이었나 봐. 첫 차를 타고 나를 찾아온 행동 또한 광기나 집착처럼 느껴지면서 더욱더 너와 이별을 하자 다짐했던 걸 보면..
2. 10년의 잊음 유예 기간
이렇게 귀엽고 멋지게 미치게 사랑을 시작하고 행복해했으니 서서히 변색이 되는 사랑도 나름 멋지게 정리하면 그것으로 완벽한 이별 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준비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첫 연애와 이별이어서 그랬던 걸까. 유난히 순수하고 열정만 있던 원석과도 같은 연애여서? 그래 그건 정말이지 '날 것의 연애'였어. 정말 기이했던 건..내가 먼저 이별을 고하고, 다시 이어지지 못할 걸 알면서도 이별 이후 10년을 매일매일 너를 떠올리며 정리 기간을 가졌다는 거야. 명백히 말하지만 그건 사랑이나 미련은 아니었어. 머리로는 사랑이 끝났음을 알았기에 나는 옳은 선택을 한 게 맞아. 그저 우리가 가졌던 추억들이 생각보다 훨씬 내 인생에서 임팩트 있었고 아름다웠고 나를 그렇게 사랑해 준 첫 사람이라는 것이 잊음의 긴 유예기간을 가지게 했던 것 같아. 너는 언제나 망령처럼 내 옆에 있었고 새로운 사랑은 새로운 사랑대로 나에게 다른 추억과 소중함을 주었어. 그리고 너에게도 멋진 새로운 사랑이 와서 더 안정적이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기를 바랐다. 그리고 언제라도 살면서 한 번만 널 다시 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렇게 10년의 잊음기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너를 잊고 살고 있을 때였어. 너도 아는 대학 동기 절친과 나는 서울의 모 백화점에서 만나 지하 1층 복도를 지나가고 있었어. 주말이라 무척 붐벼서 천천히 종종거리며 줄을 따라 움직이듯 느리게 걷고 있었지. 정말 귀신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고 하잖아? 멀리서 너의 환영이 보이는 거야. 정말 목 뒤에 소름이 돋았어. 그 순간부터 그 몇 초간이 슬로우가 걸리더라? 정말이었어. 영화에서만 나오는 기법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더라고?? 맞은편에서 웃으며 다가오는 너를 보는데 목구멍부터 울컥하며 뜨끈한 뭔가가 올라오면서 동시에 목이 막히는 걸 느끼면서도 눈은 너에게서 떼질 못했지. 10년이 넘었는데 여전한 그 얼굴, 그 걸음, 나에게 보여줬던 그 미소. 정말 너였어. 그 몇 초간 말야. 나는 반가움과 기쁨 그리고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어. 무슨 안도감이었냐고? 스무 살 내가 느꼈던 그 눈빛과 사랑은 시간에 따른 미화나 환상이 아닌 진짜였구나를 다시 느꼈거든. 넌 네 팔짱을 끼고 있는 아리따운 여자분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며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이 공간에 둘만 있는 것처럼 지나갔어. 나에게 했듯이. 넌 정말 변하지 않았구나. 그런 네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고 더 행복해 보여 다행이야. 나는 넋이 나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서서 네가 간 길을 바라보았다. 친구가 왜 그러냐고 물었고 나는 널 봤다고 저기로 갔다고 했어. 대학 동기니 그녀는 네 얼굴을 잘 알고 있었지. 친구는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을 비집고 가 굳이 확인을 하고 왔지. "어머, 정말 걔 맞구나!" 인생에서 그토록 한 번 보고 싶었던 널 정말로 보게 돼버린, 인생의 서프라이즈 모먼트에 감사했고 행복한 네 모습을 보고야 나는 마침내 우리가 잘 이별했고 인생의 멋진 결말을 향해 서로가 잘 가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 날은 마치 내게 선물과 같았다.
3. 우리의 공식 이별
우린 카톡이 생기기 전에 이별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의 메일 주소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서 혹시나 하고 카톡에 검색을 해 보았다. 그 아이디는 그 사람 말고는 쓸 수 없는 특이한 영어와 숫자 조합. 하나의 프로필이 떴다. 야구를 좋아하던 그의 프사는 아직도 야구 관련 프로필이었다. 때는 그의 생일이었다. 내 생일 일주일 후. 평생 잊을 수 없는 암기법 아니겠는가. 한참을 고심했다. 만에 하나라도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기는 싫었고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싫었다. 다만 나는 어쩌면 일방적이었고 정리 되지 못했던 이별에 성숙한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나의 첫 연애, 주고받는 사랑을 처음 그리고 함께 경험했던 전 연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내가 보낸 메시지는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나를 기억할까? 오늘이 네 생일이어서 실례가 아니길 바라며 메시지를 보낸다. 생일 축하하고 늘 행복하길 바라."
...
그로부터 5분도 채 되지 않아 바로 메시지가 왔다.
"늘 기억하지. 나에게 멋진 20대를 선물했고 함께 했던 사람. 좋은 추억 만들어 줘서 너무 고맙고 언제나 행복하길 역시 바란다." 고.
비록 스무 살의 우리는 서툴기 짝이 없는 사친자(사랑에 미친 자들), 사랑꾼호소자들이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제법 어엿한 어른이 되어서 '우리만의' 멋진 마무리를 했다.
우리는... 정말 사.랑.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