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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rlySummer Nov 04. 2024

나의 서울 생존기

엄격한 부모님은 딱 대학 졸업 때까지만 금전적 지원을 해 주신다고 대학교 입학 때부터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부모님의 성격상 그냥 하시는 말씀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1학년 때부터 그 말을 되새기며 압박을 느끼기 시작했다. 집과 먼 곳으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 나와 모든 것이 너무 달랐던 부모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던 생각밖엔 없던 시기라 그저 되도록 멀리 가고 싶었고 부모님을 설득해 결국 통학이 불가한 대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나는 나만의 원룸으로 이제 나의 첫 독립시기를 맞겠구나 생각했다. 불행히도 나의 부모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한 분들이셨다..


-극한의 거주지 part 1-


대학 시절 거주지부터 훑고 가자. 어떻게 알아보셨는지 원룸도 하숙도 아닌 일가족이 사는 집에 방 하나를 빌려서 살아야 하는 방식의 이상한 방을 구해 오셨다. 무려 학교에서 걸어서 30분 떨어진 집이었고 내가 속한 단과 대학 근처로 가는 버스도 없었다. 버스를 타도 후문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그 집엔 중년의 무뚝뚝한 부부와 역시나 말없는 복학생 아들이 살고 있었다. 총 방 3개에 화장실 하나인 집(마치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올 구옥)에서 나의 1학년을 시작했다. 분리된 게 아닌 그 가족과 한 공간에서 살아야 했다. 보증금 500에 월세 대신 관리비 월 1만 원이었다. 나는 그들의 주방에서 밥을 해 먹을 수도 없었고 화장실도 시간이 겹치면 종종거리며 늘 기다려야만 했다. 소음을 낼 수도, 너무 늦게 다닐 수도 없는 그 집은 멀리 딸을 보내는 부모님 입장에서는 좋은 감시방법이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저 많은 불편함들을 버텼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마음엔 불만이 컸지만 어렸고 부모님을 거역할 수도 없던 순진한 때였다. 2년을 그 집에 살았고 무던히도 그 먼 거리를 걸어 다녔었다. 3학년이 되면서 공부할 양도 많아지고 그 가족들과 사는 것에 이미 염증이 날대로 났었다. 부모님께 더 손을 벌리는 것도 불가했고 허락을 해줄 리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용돈은 줄 테니(참고로 10대 때에는 용돈이란 걸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필요한 물품이 있을 때 딱 그 정도의 돈만 받아서 썼다.)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아르바이트는 허락을 해 주지 않았던 상황이라 많지 않은 용돈의 일부를 월세로 쓰더라도 이사를 가야겠다고 다짐하고 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가까울 것, 월세는 최대한 저렴할 것, 나만의 공간이 있으면 됨. 이 세 가지 조건에 커트라인으로 걸리는 집(?)을 구했다. 다 쓰러져 가는 형태상으로만 '원룸'을 구한 것이다. 늘 열려있던 대문, 부식되어서 서걱서걱한 표면의 철로 된 2층으로 가는 계단, 걸을 때마다 버석버석하고 퉁퉁 울리던 멋없는 계단을 올라가면  얇은 철문으로 된 열쇠로 여는 몇 개의 현관문들이 있었다. 흡사 달동네 사글세 쪽방과도 같았다. 끼걱거리며 열쇠를 비틀어 열면 바로 나오는 반평짜리 좁은 공간에 간신히 서 있던 낡은 싱크대, 화장실은 시멘트가 덕지덕지 발라진 사뭇 공포영화에 나오는 오래된 공간미를 뽐냈고 거기엔 그에 걸맞는 낡은 변기와 앉아서 트는 수도관에 샤워기만 하나 덜렁 달려 있었다. 화장실은 좁은 주방보다 절반은 더 작았는데 변기에 앉을 때마다 폭이 좁아 어깨와 다리가 양쪽 벽에 닿을 정도였다. 죄수가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방은 꽤 넓어서 책상을 놓고 책장을 놓고 옷장을 놓고 어른 키만 한 냉장고를 놓고도 방이 넉넉했다. 그냥 그걸로 되었다. 내가 부엌이나 화장실에서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 보증금 500에 월 5만 원. 가격만 들어도 어떤 집일지 감은 조금 오지 않으실지? 그저 벽만 두른 너덜너덜한 집이었다. 거기서 또 1년 반을 살았다. 도둑도 한 번 들었다. 그런 집에 뭐 있다고 도둑이 들었는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들춰 보니 장판 밑으로 물이 새기 시작했다. 잘박 잘박... 그래도 어떻게 닦아내며 버티며 살았다. 그렇게 나의 독립 1기는 안습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극한의 거주지 part 2-


우리 과에서 가장 먼저 취업을 했다. 4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미친 듯이 이력서를 놓고 면접을 보았다. 겁도 없이 외국계 회사 마케팅팀에 지원을 했고 말도 안 되는 박봉이었지만 비전공자이자 아직 재학생인 내게 영어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대해 만족하며 용산구에 입성하게 되었다. 부모님께 입사 소식을 알렸다. 크게 감흥하지 않으셨고 대신 대학 입학 때 말씀하셨던 것과 동일한 스탠스로 이렇게 통보하셨다.

"이제 네 힘으로 돈을 버니까 대학 때 지원해 줬던 보증금은 다시 돌려주길 바란다."

그 말을 듣고 바로 든 생각.. 보증금은 날아가는 돈도 아니니 내가 괜찮은 방을 구할 수 있게 돌려받는 기한을 유예해 주었으면. 1년만이라도 내가 보증금을 모을 수 있게 양해해 주시면 안 되냐고 진심으로 부탁하고 싶었지만 나도 나였다. 그 부모님에 그 딸. 나는 간단히 맞받아쳤다. 

"네."

일면 '죄수 원룸'을 떠나며 받은 보증금을 아빠의 계좌로 바로 보냈고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처음 들어간 용산구 모처의 고시원에서 가장 싼 방으로 들어갔다. 기나긴 복도 중간에 있는 방으로 양쪽으로 타인이 살고 있었고 창문은 물감 팔레트만 한 사이즈로 복도로 향하고 있어 어디에도 한 줌의 하늘은 없었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탁한 복도의 공기와 선명히 들리는 질질 끄는 슬리퍼 소리들만이 들어왔다. 어깨만 간신히 눕힐 수 있는 침대는 그마저도 발 부분은 책상 겸 냉장고 선반 틈 아래로 들어가야 발을 뻗을 수 있었다. 봄, 여름엔 냉장고에서 나오는 열기로 불쾌한 수면을 청해야 했고 기껏해야 한 뼘 반이나 될까 한 폭의 옷장은 4계절 옷을 두기에는 무리가 있어 철마다 본가나 고시원 창고에서 옷을 갈아와야 했다. 출근시간이 모두 비슷하다 보니 샤워실은 그야말로 아침마다 눈치 전쟁으로 난리였다. 6개월쯤 살다가 6만 원을 더 주고 창문이 있는 끝방으로 옮겼고 그날 밤 반밖에 열리지 않고 보이는 건 도로와 건너편 건물들 뿐이었던 풍경이라도 나에겐 그 어느 하늘보다도 귀하게 바라보며 숨을 받아들였었다. 감옥 원룸에서 고작 빠져나와 지낸 곳이 1인 독방 같은 관짝방이었고 또 박봉에서 거금 6만 원을 더 보태 '진짜' 창이 있는 방으로 옮겼을 때 나는 감격했다. 공짜 공간이 생긴 기분이었고 나는 거기서 1년을 더 살고 다시 이사를 하게 된다. 


-고급진 공포물 체험-


좀 더 좋은 곳에서 '안전'하게 살고 싶다. 무리해서라도 좋은 곳으로 가고 싶다란 생각이 간절했다. 신촌의 신축 원룸텔. 무려 65만 원에 넓은 방과 화장실, 부엌이 있던 그곳은 나의 처음으로 제대로 된 독립 거주공간이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평수와 모던한 구조, 보안, 타일이 온전히 붙어있고 어깨가 부딪히지도 않고 녹물이 나오지 않는,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줄 서지 않아도 되는 진짜 욕실을. 여기에 더 완벽했던 건 바로 나의 고양이, '루'까지 같이 살게 된 것이다. 고양이와 온전한 내 공간이라니. 천국이 여기일까? 나는 잠시 취해있었다. 아주 잠시..

"문 열어! 씨X!" 

쾅쾅쾅쾅. 거의 매일 늦은 밤이 되면 옆 방에 사는 여자분의 남자 친구가 술에 취해 귀가해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렀다. 평소에는 굉장히 조용한 남자분이었는데 술은 그를 괴물로 만들었다. 여자 친구는 익숙한 듯 문을 잠그고 열어 주지 않다고 술이 어느 정도 깨면 들여보내는 것 같았다. 그러니 얼마나 긴 시간을 진상을 부렸겠는가. 거의 매일이 공포의 밤이었다. 뭐라고 할 정도로 용기는 없었다. 다만 사장님에게 그런 사실이 있다고 말했다. 사장님의 대답이 모호한 걸 봐서 이미 알고는 있지만 사장님도 감당이 안 돼서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날 밤도 문을 두드리며 외치는 욕설에 나도 깨고 루도 깼다. 루는 그 소리에 반응을 하며 문 앞으로 가 문을 긁으며 야옹거리며 대꾸를 했다. 그러자 예상 못한 경고가 들렸다.

"XX! 저 고양이 새끼 확 죽여버린다!"

그걸로 여기와의 인연은 끝이었다. 


-옥탑방 고양이와 나-


나는 다음 날 바로 방을 알아보았고 며칠 되지 않아 이대역 근처 옥탑방으로 루를 데리고 이사를 하며 말 그대로 '옥탑방 고양이' 롤로 살게 되었다. 탁 트인 다세대 주택에 아래층엔 주인 부부가 살고 있었고 옥탑엔 나밖에 없었다. 나밖에 없는 게 중요했다. 이전 경험이 너무 악몽 같아서 같은 층을 쓰는 사람이 없는 옥탑으로 도망을 간 것이다. 조금 낡긴 해도 이 정도면 나에겐 충분했다. 그리고 미처 몰랐던 어마어마한 옥탑방 어드밴티지가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니 어떻게 내가 집사인 걸 알고 방문을 해 주신 건지 길냥님이 자주 사료를 먹으러 찾아와 주었다. 나중엔 일행도 같이 데려왔다. 김장 때가 되면 주인아주머니는 김치를 한 포기씩 주셨다. 소소하게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제 그 부근은 새 아파트들이 지어졌다. 작년, 일 때문에 그 동네를 지나갈 일이 있어 혹시나 싶어 기억을 더듬어 가 보았다. 아! 아직도 그 집은 그곳에 여전한 모습으로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은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아 마음이 뜨거웠던 순간이었다. 


-계획에 없던 '킬러'의 고용-


그 이후 신촌에서 다시 한번 더 원룸으로 이사를 하고 이후 간절히 넓은 집으로 가고 싶어 친한 회사 언니가 살던 은평구에 있는 반지하 투룸으로 이사를 했다. 나도 드디어 침실 하나와 드레스룸(이라고 쓰고 창고방이라고 읽자.)을 가지게 되었다. 화장실은 반지하라 수압 때문에 1층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화장실 입구에 원목으로 만든 작은 계단이 있었다. 침실에 화장실이 있고 침실과 드레스룸 사이에 거실 겸 주방이 있었다. 나는 꽤나 주인 분들의 운이 좋았는데 여기 노부부도 1층에 사시면서 언제나 딸처럼 챙겨주셨다. 출장이나 여행을 가면 고양이들(그렇다. 루에게 동생들이 2마리가 더 생겼다. 그 시절 행복은 3배가 아닌 무한대였다고 볼 수 있다.)에게 사료도 주시고 물도 갈아주셨다. 나는 감사의 의미로 호랑이 연고나 손주를 위한 초콜릿이나 간식을 챙겨드리곤 했다.  

다만 이 다세대 주택이 너무 낡아 곤란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오래된 목재 건물에 상주하시는 바선생님들의 잦은 출현이었다. 거짓말 1%로 보내서 내 검지만 한 선생님들이 벽을 타고 인사를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너무 오래 머물다 그만 내가 고용한 '에프킬러'에 의해 죽임을 당하곤 하셨다... 나중엔 천장 몰딩 틈으로 나왔다 들어가는 그분들에게 크게 감흥이 없는 상태로 살게 되었는데 지금은 절대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은데 사람은 역시나 '적응의 동물'이구나 싶다. 그럼에도 이사 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살던 중에 건물을 부수고 빌라를 올린다고 해서 주인분에게 이사 비용을 받아 잠시 탈 서울을 하여 일산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연기 지옥(번외 편)-


일산에서의 삶은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제목이 서울 생존기니까. 첫 오피스텔 입주. 실평수 14평의 분리형 구조에서 나는 이제 싱글이 살기 가장 좋은 환경을 누리게 되었다. 서울보다 더 조용하고 집세가 싸면서 갖출 건 다 있는 정발산에서의 생활은 반은 좋고 반은 끔찍했다. 첫 집은 넓고 쾌적하고 안전했으나 다음집은 화장실을 통해 담배 냄새가 거의 2년간 매일 24시간 뿜어져 나왔다. 사는 내내 화장실 환풍기를 끄지 않았고 창문을 열고 살았다. 일산은 사랑했지만 담배 냄새 테러에 학을 떼고 다시 서울 직장 쪽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2년씩이나 담배소굴 오피스텔에서 살았던 이유가 있다. 이 집에 1년을 지낸 후 이사를 마음먹고 직장 주변 좋은 장소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꽤나 많은 오피스텔이 있는 지역이었고 선택의 폭이 컸다. 그러다 내 마음에 정말 쏙 드는 오피스텔을 찾았다. 그런데 나만 맘에 든 것은 아니었는지 600여 세대가 넘는 건물에 공실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사람 보는 눈은 다 같아.. 말 그대로 억지로 그 소굴에서 시간을 보내다 한계에 다다른 나는 계약 만료 3개월을 남기고 다시 그 부동산에 찾아갔다. 제발 매물이 나왔을 때  바로 연락을 주시면 어떻게든 이사 기한을 맞춰보겠다고 결연한 다짐과 함께 부동산을 떠날 때에는 애처로운 얼굴로 간곡히 애원하고 소식을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드디어 매물이 나왔다고 어서 방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퇴근을 하자마자 부동산으로 말벌 아저씨처럼 뛰어 들어갔다. 나를 끔찍한 담배소굴에서 꺼내줄 구원자여! 내가 도착하고 금방 젊은 커플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들도 내가 원하는 오피스텔 매물을 원해서 보러 온 모양이었다. 정말 간발의 차로 먼저 매물을 보고 드디어 가계약을 했다. 그리고 원래 살던 집주인에게도 이사를 통보하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설레고 기쁜 마음으로 이사 준비를 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렇게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곳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집이다. 뭐가 그렇게 특별한 지 궁금하실 몇 분들을 위해 약간의 설명을 하자면, 일단 서울에서 보기 드문 앞이 뻥 뚫린 뷰를 가지고 있었다. 정면에 보이는 건 숲이 우거진 동그란 언덕과 도로라 가리는 건물이 없고 하늘이 가득 보이는 큰 창문을 가졌다. 참 슬픈 일이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채광을 가진 큰 창을 이제서야 가지게 되었다. 처음 이사와 정리를 하고 마침내 쉴 시간이 주어졌을 때 내가 한 일은 쿠션을 바닥에 깔고 창문 옆에 팔깍지를 한 후 머리를 대고 누워 다리를 꼬고 멍하니 봄날의 햇빛과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며 순수하고 원초적인 행복감을 만끽했던 기억이 난다. 이게 창이지! 그저 감동이었다. 보안도 좋고 주차도 언제나 여유로웠고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gym이 있었고 층간, 벽간 소음도 없었다. 방 디자인도 깔끔하고 조금 좁긴 했지만(7.5평) 겨울엔 난방을 틀지 않아도 따뜻할 정도였고 여름에 에어컨을 팡팡 틀어도 3만 원대를 넘지 않았다. 건물 아래엔 편의점과 내가 좋아하는 체인점들이 있었고 엘리베이터도 6개가 운영 중이라 바쁜 시간에도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껏 살던 집 중 가장 모던하고 안전하고 시설이 좋은 곳이다. 처음으로 애정한 집이 되었다. Oh, my sweet home!


집을 이렇게나 많이 옮겨 다니면서 지금의 집에서 느낀 스트레스가 가장 없었던 것 같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공간이 주는 안정감과 행복감이 내게는 중요한 거였다. 그런 사람인데.. 정말 열악하고 다양하고 말도 안 되는 곳들을 전전하며 오래도 힘들게 살았구나. 아마 현재 내가 스쳐 온 집의 형태들에 살고 있거나 이사를 많이 다녀 본 분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했거나 더욱 힘든 경험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추억팔이로 미화하는 서울 생활이라고 쓰기보다 생존기라고 쓰고 싶었다. 그게 맞으니까. 나는 그저 살아내기 바빴고 서울은 내게 자비 없는 차가운 존재였다. 인생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아왔지만 사실 버텨왔다고 생각이 든다. 언제나 서울은 너에게 줄 집은 없어라고 말하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이사를 다니며 생을 마감할까. 이 집에서 행복하게 4년을 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 버텨내야 하지? 서울은 내게 무어길래 이렇게 허덕이며 굳이 이곳에 머무르려 하는 걸까? 생각의 전환이 왔다. 심지어 사람들도 나에게 힘듦을 주면 헤어지는 게 인생인데 서울이란 게 뭔데 이렇게 미련하게 떠나지 않고 생존을 위해 매달 돈을 벌고 교통 지옥, 붐비는 사람들 속에 살고 있지? 서울 토박이도 아니면서. 서울시민으로 살면서 뭐 얼마나 큰 혜택을 누리며 산 적이 있다고. 서울 사는 기준을 황새의 다리정도가 안정컷이라고 한다면 나는 일부러 다리를 늘리며 무늬만 황새인 척했던 것 같다는 사실 지각을 해 버린 것이다. 요즘 말로 케첩고백을 하자면 말이다. 


올해를 끝으로 나는 서울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할지 모른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름 중대 발표를 했다. 모든 사람들은 짠 것처럼 즉각적으로 놀라움과 충격을 곁들인 아쉬움을 보여주었다.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르지만 조금은 이상했다. 몇몇 친한 이들에게 되물었다. 내가 그대와 가까이 산다고 해서 나의 집을 다정하게 두드리고 찾아와 준 일이 얼마나 있었는가요? 그 물음은 오히려 그들에게 내가 서울에 굳이 있지 않아도 된다는 답을 준 것 같았다. 나는 나일뿐이지 서울이 우릴 더 끈끈하게 연결해 준 건 아니니까요. 


이제는 나의 삶을 위해 떠나야 할 '시간' 그리고 '나이'이다. 나의 현재를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하고 바뀌는 것이야 말로 가장 현명하게 나의 미래를 지키는 방법이다. 누구도 날 위해 한 평을 그저 내놓아 주지 않는 게 인생. 결코 더 젊어지는 하루는 없는 인생을 위해 서울을 떠나려 한다.  


스물두 살의 나. 서울로 온전한 독립을 했다.

2024년의 나. 지독히도 나를 홀려만 놓고 언제나 차갑기만 했던 서울과 외사랑을 끝내고 이별을 선언하다. 

Adios, my cruel city...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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