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소녀, 늪으로 태어나다

by 이영선

주말에만 늪을 찾을 수 있던 소년은 이제는 다시는 지퍼가 달린 껍질을 입고 진료실로 돌아가기가 싫어졌다. 그의 삶은 늪 쪽으로 더 많이 치우쳤고, 이제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임을 알았다. 어느 날 다시 늪에 간 소년은 소녀의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우리가 여기에서 계속 함께 살 수 있을까? 나는 다시는 껍질을 입고 진료실에 앉아 죽어있는 것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나는 괴물처럼 이미 죽어있는 것이 아닌, 죽어가는 것들에게 생명을 되살려 주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 이제 세상에는 나의 에너지를 나누어 주고 싶은 대상이 거의 사라지고 없어. 아무도 그것을 필요로 하거나 원하지 않거든. 사람들은 살아있는 걸 느끼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아. 그러면 많이 불편하고 힘드니까. 차라리 심장과 영혼을 도려내고 살아가는 쪽을 택하지.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껍질만 강하게 살아있는 뻥 뚫린 나무처럼 말이야. 내가 이전 세상에 있을 때 나에게 신호를 보냈던 건 너 하나였던 것 같아. 나는 너무 지쳤어."


"나도 이렇게 계속 늪의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외롭게 머물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늪 밖의 세상으로는 돌아가기 싫어. 그렇다면 나는 다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집을 지어서 이번엔 문을 아예 없애고 그 안에 스스로 갇혀서 살게 될 거야. 네가 입고 있던 의사 가운이 껍질이었던 것처럼 나에게는 집이 네 옷보다 더 커다란 껍데기였을 뿐이야. 다시 괴물들에게 그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을 들키지 않는다 해도, 그보다는 더 큰 세상에서 나 말고도 다른 생명들과도 함께 어울리며 살고 싶어. 그 안에선 늘 나 혼자밖에 있을 수가 없었거든. 늪이 세상에 비하면 아주 작은 곳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살던 집보다는 훨씬 큰 곳이고, 그 안에 사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아. 늪 밖은 나가지 못하더라도, 밝은 태양 아래서 가끔씩 산책은 하면서 살 수는 있을 거야. 이곳 말고는 이 세상 위에 괴물의 간섭이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이 없을 것 같아."


소녀가 대답했다. 그리고 늪은 이들의 대화를 들었다.


늪드로잉편집8글자깨기L270.jpg (그림: 이영선)

그들의 바람은 늪도 원하던 바였다. 소년이 소녀를 찾아오는 날이 늘어남에 따라 소년의 빛이 소녀에게 점점 더 많이 나뉘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빛은 배가 되어 점점 더 강하고 환하게 번졌고, 소녀를 검게 물들이던 어둠은 점점 더 엷고 투명해졌다. 늪은 이제 소녀를 더 이상 그 안에 품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축축한 어둠으로 오랜 세월을 지탱하던 늪의 심장이 말라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희미해진 어둠은 늪의 습기를 서서히 말리면서 늪의 심장부를 점점 더 지표면과 가깝도록 만들었다. 그에 따라 늪의 힘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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