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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Nov 05. 2022

작업의 리추얼 (Ritual)

주변을 정리하고 재료들과 친해지기

새로운 드로잉 작업을 위해 주문했던 재료들이 하나 둘 도착하고 있다. 작업을 구상하고 재료를 구매하고 받은 재료들을 하나 둘 꺼내어 제자리를 찾게 하는 것은 신이 나면서도 꽤나 성가신 일이지만 나름 마음을 정리하고 작업에 집중을 깊게 하는 방식이다. 박스를 뜯고 새로운 재료들을 접할 때 재료들과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온갖 포장재료를 분류해서 버리고 설명서를 읽어보고 재료에 문제가 없는지 찬찬히 살핀다. 재료가 있던 자리에는 먼지가 쌓이기 마련이다. 나는 새로운 재료가 올 때마다 먼지를 닦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안정감을 느낄 때까지 재료들의 자리를 찾아주고, 주변을 쓸고 또 닦는다. 문득 산사에서 아침마다 마당을 쓸고 있는 스님들이 생각난다. 아마도 그건 몰입과 정화, 혹은 마음 정리를 위한 빗질이 아닐까.


작업을 한다는 것은 있는 보이는 재료를 마구 써대는 것만이 아니다. 내부와 외부의 세계가 균형을 찾을 때까지 안팎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을 세밀하게 진행한다. 그래서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원하지 않는 외부인이 침범하는 것에 참을 수 없이 예민해진다. 작업이든 공연이든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는 동안은 예술가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 전시장이나 공연장에서 폭발할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 에너지가 엄한 곳으로 새어나가게 되면 작업의 흐름이 깨진 나는 물론이고 상대방은 본의 아니게 엄청난 마음의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다. 어쩔 때 나는 맹수에 가깝도록 표독해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란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결혼한 예술가와 성직자는 믿지 않는다. 내면의 깊이에 침전하지 않는 예술과 영성은 보이는 것을 초월해서 몰입할 무엇을 발견하기 힘들다. 처절하게 느끼고 내면을 갈구하는 삶을 거친 예술작품은 그만큼의 깊이가 느껴진다. 나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통해 그 사람의 내면, 혹은 신이 그에게만 부여한 순수한 그만의 신성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지금 주변을 구석구석 정리하고 닦으며 혼자로도 충분한 내 안의 세계에 깊이 침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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