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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Nov 16. 2022

돈으로 사고파는 것 너머에 있는 것

'돈, 돈'거리는 사람들이 돼지로 보일 때

나는 어쩌면 예술가로서는 최악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고 가까운 친척이고 예술에 대해 문외한이고 어떤 논리적 접근으로도 도무지 소통이 되지 않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멀리, 오래 돌아, 아주 천천히 내 삶의 궤도로 돌아와, 내게 부여된 재능대로 살아가고 있다. 내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 나는 당연하듯이 누군가 내 꿈이 뭐냐고 물으면 '화가'라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화가는 '돈'을 못 번다는 이유로 내 꿈이 오랫동안 겉으로 표출되지 못했다. 물론 되돌아보면 오히려 남들이 밟는 뻔한 제도권 교육 속에서 재능까지 소멸될 뻔한 위험을 모면한 것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이후 대학원 전공은 무용을 했지만, 나는 어찌 보면 그저 더 넓고 큰 예술가가 되어 그림으로도, 춤으로도, 문자로도 세상에 내 마음을 그려내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재능을 부여한 신이 나를 그의 세련되고 영민한 방식으로 그만의 개인 맞춤 교육을 하고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영혼은 멍해진 채, 대학이나 가려고 석고상이나 복제하고, 퇴색한 영혼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문화센터에서 나이 든 화가의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밥이나 먹고 유화 가방이나 들쳐 메고 다니는, 예술을 사랑하려 애쓰지만 그 본질 안으로는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운 아줌마들 중 하나가 되었을 소지가 높다. (나도 문화센터를 아주 잠깐 다닌 적이 있기 때문에 문화센터나 이곳을 다니는 모든 사람들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곳의 폐해 또한 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다행히 이때 만난 강사는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고, 나는 아무도 가르칠 수 없다는 귀한 가르침을 주었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아 나의 나 됨을 보존해주고, 천재라 칭송하며 내 안의 세계를 발견해주고, 용기를 준 진정한 스승이었다. 당시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나를 질투하는 줄 알고 가지 말라는 대학원을 간 것은 역시 좋지 않은 결정이었다.) 나는 내가 경제적 독립을 이룰 수 있을 때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시작할 거라 생각하고 내 꿈을 오랫동안 마음에 접어두었다가 실제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이후 내 꿈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우리 집안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술에 대한 이해가 불통에 가깝다고 느낀다. 예술이 중요한 이유는 보이는 것 너머에, 돈으로 사고파는 것 너머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여백을 채우고 있는 온기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것으로서, 이것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또 하나의 필수 구성 요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예술을 전공한다고, 예술가 단체나 협회 어디쯤 속해 있다고, 무슨 상이나 몇 개 받았다고 그것을 예술을 알고 누린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건 단지 보이는 세상을 건재하게 만드는 시스템일 뿐이다. 어느 종교 집단에 속해 있다고 그들이 모두 신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흔히, 단체에 속해있는 종교인들만 진정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듯이, 경력과 돈으로 물질적인 가치가 매겨져야 뭔가 대단한 예술을 하는 사람인 듯 오해하고 있다. 예술은 모르니 작품에 매겨진 가격이나 소속 따위로 예술의 가치를 알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명품을 가격과 브랜드명으로밖에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들과 비슷하다. 예술이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고 아무거나 막 갖다 붙여 예술이라 하는 건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든지 말든지 사실 상관이 없다. 나도 세상의 전부를 아는 것도 아니고 내가 모르는 것도 모르는 분야도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잘 아는 세상을 모르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나에게 와서 부딪힐 때이다.


나도 가끔 어딘가로부터 지원은 받고 어느 공모 지원 건에 선정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나의 예술의 진정한 가치라고 보지는 않는다. 나도 이 세상에 속해 있으니, 무언가의 소통을 시도해보기 위한 노력 이상은 아니다. 선정이 되었다는 것은 그저 그걸 주최한 단체나 기관의 취향과 목적에 부합했다는 의미이지, 그들이 내 위에서 내 작품을 어떤 절대적인 가치로 판단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선정이 권위롭게 보일 때에는 선정된 작품들이 정말로 좋다고 느껴질 때이지만, 대부분은 그저 정치 사회적 이해타산 관계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기 때문이다. 미인대회 심사위원이 미스코리아보다 아름다운 사람들로 구성되어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어떤 기준이 절대적인 것처럼 여겨질 때, 그건 마치 사이비 교주화 된 종교단체와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여겨지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러면 문제가 된다. '통제'와 '판단'과 '구속'이 시작되고 자유롭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을 망가뜨리려면 자아가 확립되기 전에 상이나 보상을 계속 줘 버릇하면 된다. 상벌의 기준에 따라 자아가 망가져 사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평생 판단과 상벌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정작 시험이나 상벌 같은 것이 없으면 인생의 공허함에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즉, 타인의 기준과 판단에 세뇌와 가스 라이팅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원은 고사하고, 예술을 하는 것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예술에 대해 얘기를 꺼낼 수 있었던 때는, 나름 가기 어렵다는 학교에 진학했을 때, 지원 건 등에 선정되었을 때였다. 나는 항상 그대로 나였고, 변한 적이 없는데, 나에 대한 인식은 겉에 붙여진 어떤 단어들로 인해 다르게 변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런 모든 경력에 대해 집안에서 뭔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다. 어떤 페스티벌이나 공연, 혹은 전시 기회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아무런 감정도 없이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내뱉는 첫마디는 '축하한다' 아닌 '얼마 준데?'였다. 참 슬픈 일이다. 나는 이런 반응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내가 하는 일들을 가족에게 말하지 않는다. 내 인생에 아킬레스와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그나마 오래전 예수가 세상에 나왔을 때에도 정작 예수 자신의 가족 중에 내놓으라 하는 선지자가 나오기는커녕 미션에 방해만 하고 고향에서도 무시만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예술의 본질이 얼마나 소통이 어렵냐 하면 내 가족과의 소통도 불가능에 가깝다.


최근에 재료비 지원을 받아 그림도 그린다 하니까 갑자기 연락이 와서 '그림을 팔아준다'며 왜 그림을 팔려하지 않느냐고 다짜고짜 황당한 질문을 받고 마음에 동굴이 더 깊게 패이는 것 같았다. 이에 더해 무슨 협회 등을 운운하며 예술에 대해 뭔가 아는 척을 하며 내게 가르치려 들었다. 00 협회? 쳇! 헛웃음이 난다! 그게 뭔지 알고나 말하는 것일까? 일반 사람들은 '협회' 같은 게 붙으며 뭐 대단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상대가 일부러 내게 상처를 주려고 연락해서 한 말이 아닌 걸 알기에, 당사자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을지 몰라도, 나는 분노에 가까운 감정이 가슴속에서 치민다. 분노라기보다는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속에서 터질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더 힘들다. 상대의 의도가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니 대놓고 화를 내거나 싸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이럴 때 속이 상하고 가슴에 회색빛 우울함이 밀려온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예술은 돈으로 사고파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사고팔 수도 있지만, 기 위해 그리는 것과 그렸는데 어쩌다 팔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고 내 작품을 누가 산단 말인가. 나는 내 작품을 사랑하지만,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다. 심지어는 나는 화가로 불리기도 힘들다. 내 작품은 세상의 금 테두리와 온갖 증빙서류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고, 세상이 구분해 놓은 카테고리로도 분류되지 않는 나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것은 그저 나의 존재, 나의 삶의 현재이기 때문이다. 내 영혼은 물건이 아니다. 그래서 파는 것에 우선해서 가격이 매겨지는 게 몹시 성이 나고 불쾌하고 열이 받는다.


내 주변 작가들끼리 하는 소리가 있다. 팔기 위해 작품을 하는 순간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라고. 그 자는 예술가로 실패한 것이다. 그게 왜인지는 예술가라면 안다. 자신의 예술이 상품이 되는 순간, 예술가 자신은 급히 불행해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근본적으로 비영리의 영역이다. 예술은 기술에 앞서 마음과 영혼이 충만해져서 넘쳐흐르는 것을 어떤 표현의 도구로 받아내는 것이다. 예술가와, 기술만 반복하는 '쟁이'는 다르다. 예술가의 출발은 철학과 마음과 영혼과 생각과 관찰과 감정과 관심, 사랑, 열정 등이지, 쟁이가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 교회와 사찰을 운영하는 것과 사역을 하다 보니 돈이 생기는 것이 다른 것처럼, 본질과 부수적인 것이 주객이 바뀌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통상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매번 씁쓸하다.


수천 권의 글을 쓴 들 내가 느끼는 터져 나올듯한 답답한 감정을 잘 설명할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나와 같은 답답함을 겪어본 예술가가 어디에라도 있다면 암묵적인 공감이라도 받고 싶어 이 글을 써본다. 예술에 돈이 되냐 안되냐로 '돈, 돈' 거리는 저급한 사람들에게 돼지 '돈'자를 붙여주고 싶다. 하긴 그래서 '돈 (MONEY)'이 '돈 (PIG)'와 같은 발음인가 보다. 돼지면 잡아먹기라도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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