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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Aug 16. 2023

영혼 도둑과 순살 인간

기성세대들의 착각

한 번도 일해보지 않은 에이전시에서 강의 제안이 들어왔다. 강의는 가능하면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잠깐 한두 시간 다녀오면 될 듯했다. 강의료가 적었지만, 강의야 눈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단기간 하는 강의라면 재미 삼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시간에 대해 가치를 지불받는 프리랜서이다. 흔쾌히 강의 내용에 수락을 했는데, 이후 사람을 바꿔가며 자꾸만 사소한 사항을 전달하는 전화가 오고, 줌 미팅을 요청하고, 이메일로 이런저런 자료와 자신들의 내부 시스템을 더 잘 보이게 하려는 쓸데없는 일들을 계속해 요청하기 시작했다. 주말 내내 기분이 뭔가 불쾌하고 불안하고 불행한 느낌이 들었다. 최근에 작업 때문에 신나게 몰입을 하고 있는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유 없는 불행감의 구름이 내 마음에 끼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아무 일도 없다고 나를 다그쳤는데 분명히 내 영혼은 무언가를 알고 거부하는 듯했다. 나는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었다. 내 마음은 이 일을 하기 싫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내 마음에게 이미 하기로 한 일을 거절하기란 힘들지 않을까 설득하고 있었다.


저녁에 같은 에이전시에서 일을 해 본 강사와 전화 연락을 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강의라는 본 업무 내용과는 상관없는 시간 소모적인 일을 내게 자꾸 부탁해서 나의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무료로 갉아먹고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에이전시의 가스라이팅에 내가 말려들고 있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치 그래야 하는 태도로 나의 강의 콘텐츠를, 그것도 자신들 회사의 로고까지 넣어서 문서로 전달해 주기 바랐는데, 내 지적 재산을 무료로 알맹이만 쏙 빼먹으려 하는 그들의 술수에 내가 하마터면 걸려들 뻔한 것이었다. 다행히 메일은 보내지 않았고, 강의 외 이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소모한 시간은 이미 약속한 강의 시간을 훨씬 더 넘어 선 것이었다. 나는 이들이 나를 은근슬쩍 강의 외 일을 하게 만든 것이 좀 억울했지만, 덕분에 강의 진행을 단칼에 취소할 이유가 생겨서 오히려 좋았다.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자신이 하는 일을 그 자체로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은 알아서 최선을 다하고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베푸는 사람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걸 이용해먹으려 하는 알량한 꾀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내가 가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내 일에 열정을 접게 만드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잘 이용해 먹는 방식은 그냥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 정도로 사람 볼 눈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고용주로서의 자격도 없다.


기업에서 사람을 고용하기 힘들고 이직률이 높다며, MZ 세대 어쩌고 하는데, 그건 무슨 그 따위 세대 같은 게 존재해서가 아니다. 애초에 그런 알파벳 세대라는 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세대일 뿐이다. 굳이 알파벳으로 세대를 구분하려면 나는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는 YS세대라 자칭하고 싶다. 나는 늘 YS 세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국 기업 사회에서 우울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넘쳐난다. 그게 왜 그럴까 했는데 바로 내가 겪은 문제가 본질적인 게 아닌가 싶었다.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투명하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 않다. 정확하게 업무 내용을 제시하고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하며, 꼭 그 일을 원하는 사람이 그 일을 지원하면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사람들의 거짓말 때문이다. 고용하는 사람은 애초에 내세운 업무 이외에 다른 것들을 은근슬쩍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에 집어넣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을 거절하거나 선택할 권한이 상대에게 없는 것처럼 고도의 세뇌작용을 통해 인지시킨다. (물론 고용당하는 사람도 거짓말쟁이 투성이이다. 열정을 모방해서 입사만 해놓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 세뇌를 당하는 사람은 본인들의 거부의사는 무책임한 것인 알 수 없는 죄책감을 갖게 만든다. 그런데 고용주는 항상 원하는 때 아무 이유로도 고용한 사람을 거절하거나 일의 내용을 변경하는 것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일의 관계가 투명하지 않고 원하는 것보다 더 적은 비합리적인 대가를 지불하면서도 상대 위에 서서 소위 '갑질'이라는 것을 하며 조종하려고 하는 것, 바로 그게 한국 기업 사회의 큰 문제점이 아닐까 싶다. 그건 일종의 사기이다. 제대로 값을 지불하지 않고 상대의 이점만 더 취하려는 행위, 그것이 바로 사기꾼이다. MZ가 어쩌고 하기 전에 사회에 사기꾼이 얼마나 많은지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나는 이미 상대가 제안한 강의 시간보다 내 시간을 더 많이 무료로 허비했으므로 내가 어떤 거절의 방법을 써도 그들은 할 말이 없음을 납득하고 아주 쿨하게 소위 갑이라는 자들이 늘 하듯이 문자 한 마디로 강의를 취소시켜 버렸다. 어차피 헐값의 강의였으므로 잃을 것도 없었고, 나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한 번 전화가 온 것 같지만, 나는 이미 내가 이들에게 허용한 시간 이상의 귀중한 내 인생의 시간을 허비했으므로 대꾸 할 가치도 의무도 없다고 판단했으며, 이들이 만일 그들의 계획에 차질이 없기를 바란다면 나에게 합당한 돈을 지불하면 간단한 문제일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본주의일 것이다. 원하는 게 있으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것을 가지면 된다. 대부분의 문제는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이익은 그대로 얻으려는 것에서 온다. 그 외의 소통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이들은 나보다 돈이 많은 자본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가 그들 사정 따위를 돌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사기꾼은 특성은 늘 그렇다.


"미끼를 물면 늘 다른 것을 요구한다. 그것도 스미듯이, 판단을 못하도록 알딸딸하게 만들면서 마치 마취주사액이 들어와 서서히 판단능력을 마비시키듯이, 그렇게 상대를 불행하게 한다."


'순살 아파트'라는 웃픈 신종어가 생겼다. 진행 과정에서 얼마나 중간에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남겨 먹으려 했으면 철근이 하나도 안 들어간 '순살아파트'를 지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이 건설업계만의 문제일까. 사회 곳곳에, 개인 하나하나에 이런 사기꾼 적인 기질과 태도가 숨어 있다. 사람들이 단순하고 투명하게 살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데 그 간단한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아무튼 희한한 동방의 지구인들이다. 마음의 철근인 영혼이 없는 순살인간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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