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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Aug 23. 2023

예뻐서, 잘나서 미안해야 하는 나라

'사회성'에 대한 황당한 인식

어느 천재라 불리던 순수하고 귀여운 모습의 아이가 언론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다. 본질은 한눈에 보이는데, 본질조차 보지 못하는 대중이라는 사람들의 온갖 지저분한 댓글과 상처를 주는 말들이 난무해서 한 아이와 가족을 죽이고 있다. 댓글에 천재는 다른 사람의 시기 질투를 이해해야 하고, 그런 게 사회성이라는 식의 황당한 글귀가 하나도 아니고 아주 많이 보였다. 예전의 트라우마가 올라와서 공감력이 풍부한 나는 이런 댓글을 다는 사람들의 폭력성이 내게 전이되어 심장이 비틀거리는 것을 느낀다. 나도 비슷한 것을 겪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시간을 현재와 똑같이 살고 있고 꿈속에서 이들과 싸우고 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나이가 훌쩍 먹어버렸다는 것을 굳이 자각해야만 그 트라우마에서 조금 멀어질 수 있다. 그것은 아직도 삶의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다. 사회가 그다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왜 대놓고 싸우지 않았을까? 왜 나는 착하게 이들을 이해해야 했는지가 인생의 후회로 남는다. 나는 이 아이가 '착한 아이'로 남지 않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평생의 트라우마와 후회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질투와 시기는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문제이고,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것이 폭력적 가해로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걸 감내해야 한다는 식의 의견이 '미친 사람의 것'이라고 인지도 못하고 있는 이 상황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폭력을 용인하는 것을 '사회성'이라 표현하는 이 무지한 인식이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성이라는 것의 의미를 재고해야 하는 때가 온 것 같다.


시기와 질투는 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존감이 낮은 심리상태에서 나온다. 부러움과 이를 용인하고 상대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은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기 천재성 혹은 남다른 어떤 부분을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는 다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데, 사회에서 어떤 하나의 기준으로만 그것을 우월한 천재성으로 보고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일괄적으로 낫다고 평가하는 이상한 서열화된 의식 때문에 왜곡된 심리상태가 발현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 수학문제를 잘 푸는 대신 요리는 못할 수 있다. 그러면 나 같은 경우, 수학문제를 푸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능력이고 부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에겐 다른 걸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 그걸 굳이 끌어내리고 비난하는 말을 퍼붓는 못난 시기와 질투심을 표출하지는 않는다. 나도 인간이기에 질투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나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조물주에 대한 약간의 서운함 같은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나에게 집중하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부러워하는 것과 시기 질투로 남을 깎아내리고 흠집을 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내가 나로서 나를 인정한다면 시기와 질투를 할 이유가 없다. 남과 자신을 비교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낮은 자존감과 자아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남을 해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똑똑해서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면 이쁜 것도 죄가 된다는 뜻이고, 누군가 내가 이뻐서 시기와 질투를 하면 그것을 내가 묵인해야 사회성이 좋아진다는 그런 뜻이다. 실제로 이쁜 사람에게 가해지는 폭력도 만연한다. 이게 한 두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는 것에 나는 경악한다. 나는 내가 겪어온 불편감들이 시기와 질투인지도 최근에서야 알았다. 시기와 질투를 받는 나와 같은 당사자들은 남들이 시기와 질투를 하는지 아무런 감각도 없다. 그저 자기 할 도리에 집중을 할 뿐이고 자신이 남들보다 뭘 더 가지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특별하다고 느끼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라 남들이 그렇게 말하니 그런가 보다 느끼는 게 더 크지만, 당사자들은 뭐가 특별하다는 것인지 조차 구분이 안 가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천재가 어떠해야 한다는 판단으로도 이들에게 어떤 피상적인 잣대를 들이대지 말았으면 한다. 이들도 대부분 여느 사람들처럼 그저 자기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것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평범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다. 나라를 위해서 뭘 해야 한다는 등, 대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을 해야 한다는 등, 그러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는 둥, 미안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특히 한국에 있다면 은둔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의 문화이다. 그리고 삶의 목표와 만족의 기대치는 사람마다 다르다. 정량화된 표준을 원하는 사회 제도 상에서 제도 밖에 있는 이들이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경로가 대부분 차단되어 있다. 이들이 어디에서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학교에서도 감당이 안 되는 이들이 사회의 어느 제도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인가?


한 학부모가 내게 말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본인들은 얼마나 돈을 쏟아부었고 뒷바라지를 했는데 나 같은 사람이 들어와서 기분이 나쁘다고. 몇몇 친구들이 말했다. 수업시간에 다른 사람들의 눈빛을 본 적이 있냐고. 한 선생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뽑아는 놓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고. 언젠가는 가만히 있는 나를 끌어내어 굳이 싫다는 것을 언론에서 자신들 멋대로 악의적인 편집을 해서 불쌍한 천재로 만들어 놓았다. 이후 가만히 잘 살고 있는 내게 그렇게 잘났는데 왜 여기에 있냐는, 그딴 식의 말을 하며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자신이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 아닌 이들이 안타깝다. 이 아이가 들었을 말을 나도 대부분 들었다. 그래서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거의 살기 같은 분노가 아직도 내 마음에 생생하게 차오르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미안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당신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우리의 세계를 충분히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라 말하고 싶다. 그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되지 않는 가해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과도 수준이 어느 정도 되어서 상대를 배려할 수 있는 사고능력과 아량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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