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미술 수업을 잠깐 받은 적이 있긴 하다.
어렸을 적 나는 꿈이 화가였지만, 아무 학원도 다니지 않았다. 집에서 보내줄 형편이 되지도 않았고, 화가가 되면 가난해진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집안에서 자랐다. 그래도 미술상은 많이 받았다. 가장 큰 상을 받았던 것이 놀이터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던 것이었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남들 흔한 동상을 받을 때 그래도 혼자 은상을 받았던 작품이었다.
나는 늘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빼꼼히 문이 열려있던 1층의 미술학원 앞에서 한참을 서서 내부에 걸린 그림들을 구경하다가 집에 오고는 했다. 그때 걸려있던 명태와 각종 과일의 정물화 등이 생각이 난다. 세월이 가도 아직 그런 걸 똑같이 그려대야 운영되는 대부분의 동시대의 미술학원을 보면 좀 아이러니한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몰랐을 땐 나도 문틈으로 누가 가장 똑같이 마른 명태의 그림을 그렸는지 혼자서 가늠해 보곤 했는데, 그런 교육을 안 받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첫 정식 미술수업은 미국 교환장학생으로 영문학과에 잠깐 재학하던 중, 교양 수업으로 처음 미술수업을 받았을 때이다. 그때 샀던 드로잉 도구와 스케치북, 선생님이 나눠준 수업 자료는 아직도 지니고 있다. 실기도 했지만, 명태를 똑같이 그리는 그런 수업은 아니었고 오래된 명화나 드로잉들을 살펴보며 구도나 선적인 표현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시각예술적 이론과 예제도 접하고, 그에 따라 일상에서 자유롭게 나만의 드로잉을 과제로 몇 개 제출하는 것이었다. 그때 미술작품에서 '개성' 혹은 '나만의 기법'과 같은 개념을 어렴풋이 접했던 것 같다. 나는 당연히 배운 적도 없었기에 아무렇게나 몇 점 그리다가 한 학기가 끝나고 말았는데 그때 그렸던 것도 물결의 무늬와,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의 결이 강조된 나무였던 것을 보니 24년 보다 더 이전부터 이미 나무와 자연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같다.
두 번째 미술 수업은 다니던 회사 옆 문화센터 유화반이었는데, 머릿속에 그리고 싶은 이미지들이 많았는데 막연히 유화물감으로 그리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재료를 어떻게 쓰는지만 알면, 머릿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끄집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선생님은 첫날 물감을 짜서 테레핀유를 섞어서 쓰는 것과 붓을 고체비누에 비벼서 빨아 쓰는 것 이외에 별로 가르친 게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 선생님을 내 진정한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첫날 유화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단숨에 휘휘 그려버린 내 그림을 보고 천재라고 치켜세웠다. 아니꼽겠지만, 나는 종종 천재 소리를 듣는다. 배운 적이 없이 그냥 혼자 직관적으로 해내는 것들이 많아서일 것이다. 덕분에 학원이나 학교 교육비는 거의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혼자 배우는 것을 즐겨하고, 더 빨리 잘 배운다. 그렇지만, 천재성은 누구에게나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 있는 천재성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건 잘 못한다. 답답해서 그 시간에 차라리 내가 새로운 것을 몇 개 더 배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을 내고 무엇을 배운 적이 많이 없어 상대에게 돈을 요구하는데도 서툴다.
그는 자신의 화실에 와서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자신의 화실에서도 내 그림에 대해 그는 전혀 별다른 코멘트를 하거나 손을 대지 않았다. 당시 잘 몰랐던 나는 똑같이 돈을 내고 가는데 나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소위 말해 '잘 그리는 화가'의 유화처럼 나아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내 그림의 '꼴'에 속으로 조금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몇 번 안 가고 그만두었다.
그렇지만, 그를 내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나보고 "너는 아무도 가르칠 수 없어. 너는 그냥 니 맘대로 그려"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며 나를 내버려 뒀기 때문이다. 내가 미술대학원도 아닌 무용대학원에 가서 돌아왔을 때에도, "너는 학교에 뭣하러 갔니? 너는 그냥 계속 니 작업을 해. 네 길을 네가 내면서 걸어가는 거야. 너는 아무도 가르칠 수 없어"라며 당시에는 알듯 모를듯한 얘기를 했다. 하지만 몇 년이 더 지나고서야 그게 무슨 말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런 말은 이후 국내에서도 외국 학교에서도 많이 들었다. 대놓고 입학 면접시험 때 "우리 학교에서는 감당하기 힘들어요"라고 했지만, 결국 국내외 대학원 모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저 내가 직접 길을 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예술가, 아니 여느 누구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유일무이한 인간으로 살고 있다.
진정한 스승은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깨닫게 해 준 사람으로서, 나는 그를 나의 첫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어설프게 어떤 대안도 없으면서 일부 교수들처럼 나를 자신들 아래에 두고 그들처럼 만들려 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이 가장 좋은 가르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