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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Sep 02. 2023

곁눈질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

훔치고 도용하고 염탐하는 사람들

나는 남의 것을 훔치고 도용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특히 창작자로서 무언가를 새로 만드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일이지만, 베끼고 훔치는 것은 아주 쉽기 때문이다. 물론 흉내는 낼 지언정 본질까지는 훔치지는 못하겠지만, 어차피 본질까지 볼 수 있거나 거기까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므로 결국 세상 사람들에게는 진짜와 가짜가 모두 한 덩어리로 보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나는 살인자나 강도는 내 일이 아니면 과격한 느낌까지는 들지 않으나, 내 삶을 염탐하고 어설프게 모방하는 사람들은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나한테 이런 사람들은 어느 독재자나 테러리스트보다 악한 자로 서열 1위에 올라있는 사람들이다. 


창작은 내 자유와 행복을 위해 내가 선택한 일이므로 그걸 타인이 하찮게 여기든 말든 그다지 상관이 없다. 내가 낳은 내 자식이 옆집 하버드대 교수보다 아무려면 더 사랑스럽고 소중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누군가가 내 자식을 해하면서 '너의 자식은 세상에 덜 중요하고 유명하지도 않으니 내가 좀 훔쳐가서 노예로 좀 살게 만들게'라고 한다거나 '내가 더 유명하니까 너의 자식이 조금 잘하는 부분을 내 것에 좀 보태서 쓸게'라고 한다면 그 누군가의 치부를 당장 발길로 걷어차고 계단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뜨리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물론 실행에 옮긴 적도 그럴 생각도 없지만, 그런 생각은 종종 하는 편이다. 


창작은 오랜 기다림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래로 걸어가는 것과 같다. 남 보기에는 하찮은 동그라미 하나일지라도 그것을 만들어내기까지 누구는 목숨을 걸고 몰입하는 긴 시간을 인내해야 했을지 모른다. 자기 것을 하나도 만들어보지 않은 자들은 남이 노력해서 만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창작하는 사람이 머리를 굴리며 이 때는 이런 모습이었다가 다른 때는 이런 모습이었다가 하면서 살지 못한다. 그런 모습이 가능하다면 대부분은 애초에 예술 따위는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사람을 분별하는 것도 잘 못하고 사람을 조심하는 것도 잘 못한다. 그래서 차라리 '차단'과 '손절'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나를 보호하는 편이다. 그나마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는 이곳에는 그래도 자신을 밝히고, 소수이긴 하지만 비교적 진솔한 사람들이 예의를 갖추고 글을 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많은 결심을 필요로 한다. 글을 내렸다 다시 올렸다를 반복한다. 독자들이 많이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내가 글을 지우던 올리던 아무도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물론 브런치에도 읽고 공감하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남의 것을 은근히 염탐하고 훔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모양새는 비슷하나 이 둘의 차이는 크다. 


창조는 모방의 어머니라든지, 영향을 받는다는 말은 훔치는 사람들이 가장 잘 쓰는 핑곗거리다. 나는 이런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사람들도 최고로 경멸한다. 진짜 자기 것을 하는 사람들은 저런 말을 굳이 입에 올리며 변명하지 않는다. 그 말은 맞으나 훔치는 것은 훔치는 것이고, 내면화해서 자기의 경험으로 깨달은 것을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비슷하거나 심지어는 똑같이 말하는 것 같은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실제로 살면서 내가 하고픈 말을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했거나 누군가는 정말 단어 하나도 틀리지 않고 되뇌고 있다고 느낀 적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로가 한 세대를 통해 공감을 하고 있다는 아주 긍정적인 표시이기도 하다. 동시대의 말 뿐인가? 심지어는 읽어보지도 않은 유명한 저자의 이론이나 철학적인 문구를 나중에 알고 보니 비슷하게 깨닫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이 먼저 했다고 해서 나도 똑같이 느꼈는데, 시간차를 두고 느꼈다고 그 말과 문장을 그 사람만 쓰라는 법을 정해 놓는 것은 좀 애매한 문제다. 이런 것은 법으로도 규제가 안된다. 결론적으로는 늘 주장하는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이라는 인간 고유의 제어 기능으로 개인의 마음에서 규제를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상은 말 그대로 현실화되기 어려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갑자기 나는 또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아, 이유가 생각났다.


내 작업실에 오는 사람들을 나는 환영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문을 닫는다. 작업실을 궁금해서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경계 없이 대화를 나누는 편이다. 그런데 가끔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척하면서 나의 작업을 염탐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눈을 똑바로 뜨고 대상이나 상대를 응시하지 못하고 곁눈질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 관심이 없는 듯하면서 눈동자는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인다. 모르는 척, 아닌 척 있다가 어느새 그들의 말이나, 글에서 내가 한 말의 소화되지 않은 껍데기를 발견한다. 내가 무심코 구석에 놓은 과정 중 결과물들을 은연중에 입에 올린다. 이들의 말은 늘 어디서 인터넷 포털 같은 곳에서 가볍게 주워들은 말을 지껄이며 자신을 포장한다. 말은 하지만 중심이 없고, 행동의 결과가 없다. 처음엔 유려한 말솜씨에 속았다가 만남을 거듭할수록 공허한 바닥이 드러난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사회의 표면에 나와서 그 본질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면서 오리지널 한 사람들의 노력의 대가를 여러 형태로 수금을 하고 다닌다는 데 있다. 


대형마트 같은 곳에서는 경쟁사에서 사람을 보내어 염탐을 하거나 시장 조사를 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나 염탐을 하는 사람들의 겉모습은 비슷해 보인다.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도 물건의 값과 정보를 이리저리 살펴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염탐을 하는 자들은 곁눈질로 이런 것들을 볼 것이다. 언젠가부터 내 작업실을  불쑥 방문한 한 예술과 대학원생이 꼭 그런 느낌으로 내 공간과, 작업과, 내 생각을 염탐하고 갔다. 그것이 정직한 질문과 호기심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허심탄회한 대화를 지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몇 번 만나고 은연중에 깨달았다. 나에게 뭔가 필요한 것을 취해서 타인에게 인용하고, 자신의 작품에 이용을 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왜냐하면 나와, 나의 공간, 나의 작업시간에 대한 존중심이 없고, 그녀의 눈동자는 곁눈질로 이리저리 염탐을 하느라 바빴고, 말은 시종일관 속을 알 수 없도록 빙빙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인정 많은 나는 처음엔 무지하지만, 한 번 내 레이다에 가식의 기미가 포착되면 나는 상대의 행동과 말속에 숨은 것들을 아주 민감하게 포착해 낸다. 결국 나는 친근함을 가장한 이 악귀를 조용히 차단하고 손절했다. 악귀가 된 그 존재는 평생을 그렇게 훔치고 배회하며 남의 것을 의존하면 살 것이다. 


아, 언젠가 작곡을 했다며 들려준 짧은 피아노곡이 '라라랜드'와 거의 똑같은 것을 본인이 모르길래 내가 알려준 적이 있는데, 그때 그의 성정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곡인데 제목이 생각이 안 나서 하루 종일 궁금해하다가 결국 내가 그녀에게 알려주었는데, 그런 말을 들었으면 본인이 밤새 찾아냈어야 우연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라도 할 것이다. 그냥 그는 그런 악귀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모르면 상대에게 두 눈을 바라보며 솔직히 질문하고, 뭔가를 곁눈질로 염탐하지 말고 투명하게 궁금해하며, 속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을 빙빙 돌리면서 상대의 영혼을 피곤해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발로 차버리고 계단 밑으로 데굴데굴 굴려버리고 싶은 걸 참느라 소중한 에너지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미사여구 가득한 글도, 사람도, 작품도, 진저리 나게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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