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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Dec 10. 2023

점을 볼까?

연말연시, 혹은 뭔가 일상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종교와 무관하게 '점을 볼까?'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주변에서 용하다는 사람들을 만나보았다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심지어는 이런 것과는 무관한 종교단체에서도 비슷한 주술의식 혹은 점술상담 같은 것을 해서 그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으면 갑자기 암암리에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유명세를 타기도 한다. 나도 이런 것들에 가끔 호기심이 가기도 하지만, 별로 신빙성이 없다고 느끼거나, 혹은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에 크게 의존하고 싶지 않아 아직까지는 잠깐씩 호기심만 갖다가 말기도 한다. 그래도 연말이 되면 재미 삼아 한 번 '점을 볼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경험치가 있어서 픽 혼자서 웃으면서 생각을 바로 접는다. 어딘가에는 정말 사람의 속을 꿰뚫는 듯한 영적인 능력이 있는 누군가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일반인의 눈에 잘 띄지 않아 찾기도 힘들 것이다. 


'점을 볼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를 때마다 그런 생각을 곧 접게 만든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런 것들이 정말 신빙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려면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누군가와 함께 한 번 가보면 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전, 운동을 하는 딸을 둔 학부모가 함께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자고 한 적이 있었다. 그 점쟁이는 나를 보고 다짜고짜 '남자가 앞에 앉아 있네'라고 하며 개명을 해야 한다며 돈을 내라고 했다. 내가 알기로는 나의 부모님이 당시 유명하다고 하는 철학관에서 돈을 많이 주고 현재의 내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그것의 신빙성도 의문이긴 하다), 그럼 그때 그 점쟁이와 이 점쟁이 간에 존재하는 의견의 불일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상상하기엔 TV에서 본 것처럼, 보자마자 나에 대해 뭔가 알아맞히거나 그래야 하는 장면이 떠올랐는데, 동사무소에서 호구조사를 하듯이 나에게 자꾸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다. 결론적으로는 뭔가 가만히 있는데 알아맞히거나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저것 물어봐서 그 정보를 조합해서 상대를 넘겨 짓듯 파악하는 것 정도는 얼마간의 세월을 산 사람들은 대부분 파악하게 되는 어떤 것이지, 영험하고 특별한 누군가가 말할 수 있는 것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는 나보고 곧 결혼을 해서 남자아이를 곧 갖게 될 것이라는 등의 과학적으로도 불가능한 것들을 말했었다. 내가 동정녀 마리아도 아니고 갑자기 무슨 아이를 어디서 갖는지 되물으니 (아이는커녕 나는 강아지 같은 것을 키우는 것도 극도로 싫어한다), 당시 그는 막무가내로 자기 눈앞에 남자아이 하나가 보이는 걸 그냥 말하는 것이라는 등의 말도 안 되는 말을 했다. 나는 별로 뭘 알아맞히거나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혀 해주지 않는 그에게 벌써 흥미를 잃고 있었다. 


더 재미있는 일은 그가 옆에 있는 학부모와 대화를 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에 일어났다. 학부모에겐 딸이 둘 있었는데 내가 그 학부모의 고민을 들어봤을 땐 그 점쟁이보다는 내가 더 확실하게 고민의 답을 해 줄 수 있는 부분인데 그걸 왜 오늘 처음 본 낯선 이에게 물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쟁이는 그녀의 딸이 하는 분야에 대해 잘 알리도 없거니와 내가 듣기엔 말도 안 되는 답인데도, 그것이 학부모의 허황된 바람에 부합해서 그런지 학부모는 더 신이 나서 그 점장이의 어불성설에 장단을 맞추고 있는 듯 보였다. 예를 들면, 당시 신체조건이나 역량이 거의 표준에도 못 미치는 상태의 딸이 앞으로 어떻게 될 거냐고 물으니, 그 점쟁이는 금메달이 보인다는 등, 국가대표 선수가 될 거라는 등, 아주 유명해질 거라는 말을 했다. 나는 당시의 상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기적과 같은 일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사람일, 특히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의 신체와 마인드는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기에 함부로 미래를 판단하는 일은 하지 않으므로, 의아해하면서도 그런 의구심을 애써 억누르며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에누리를 쳐도 갑자기 그 학생에게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논리적으로는 희박해 보였다. 그건 그 점장이 보다 그래도 그 분야에 대해 더 전문인 나에게 물어보면 될 것을 왜 낯선 이에게 찾아가 먼 훗날의 일을 물어보는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상식적으로도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당장 기네스북에 오르거나, 성경책 속에 나오는 기적과도 준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그 점장이가 말한 예언은 이후 하나도 실현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내 머릿속에 있던 뻔한 결과가 현재의 실상이 되었다. 점은 누가 치고 돈은 다른 이가 받아갔네란 우스운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어쨌든 당시 나와 그 학부모는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정도의 대단한 기적의 예언을 듣고 그 점집을 나왔다. 나는 허탈하고 돈이 아까워서 이런 것에 혹한 나를 스스로 나무랐는데, 그녀는 뭔가 그날 내내 들떠 있는 듯했다. 거기에서 느낀 것은, 상대의 간절함에 장단을 맞춰주면, 특히 자식에 대해 콩깍지가 씐 학부모들에게는 자식에 대한 긍정적인 바람을 잘 들어주면 용한 점장이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나에겐 그렇게 허황되게 들리는 것이 당사자에겐 그렇지 않게 들린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나서, 상대가 용한지 아닌지는 그 얘기를 들은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면 확실히 알 수는 있으나, 주변사람들은 감히 그런 것을 솔직하게 얘기해 줄 수 없기에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느꼈다. 단 한 가지, 그것이 어불성설이라 할지라도 점장이가 말한 내용이 그때 잠시 동안 만이라도 상대에게 긍정적인 희망을 가지게 할 수 있다면, 힘든 당시의 시절을 조금이나마 잘 보내게 할 수 있게 하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그런 긍정적인 희망이 어떤 기적으로 연관될지도 또한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누군가가 점집에 다녀왔다고 하면 본인들은 용하게 맞다고 하는 내용들이 옆에서 보기에는 현실과 전혀 다른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도 누군가가 내 앞날을 속시원히 말해주었으면 하다가도 이내 생각을 접어버리곤 한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에 대한 점의 내용도 다 다르다. 열 명 이상의 두루뭉술한 이야기가 다 다른 걸 확인하게 되면 결국 자기 인생은 자기의 주관과 소신대로 살아가며 스스로의 운명을 수용하고 감내하고 개척해 가야 한다는 불확실성이 정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대로 가다가 결과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아니면 말고, 대신 그 과정은 나의 선택이고 그것을 즐기고 행복해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인생이 없을 것 같다. 


더 오래전, 대학생이었을 때, 학교 캠퍼스를  배회하며 학생들의 점을 봐주고 용돈 정도를 받아 사는 유명한 할아버지가 벤치에 앉아 있던 나를 보고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놀랍다고 말한 적이 있다. 벌써 죽었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나의 모친은 한 10년 전쯤 폭삭 늙고 망해서 힘든 상황에서 갑자기 나의 친구들이 있는 자리에서 본인이 빌딩을 짓겠다고 말해서 나와 친구들 앞에서 크게 말다툼까지 한 적이 있다. 나는 죽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던 엄마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사업을 일으켜 그간 건물을 몇 개 지었다. 인생이란 그런 것 같다. 자신의 점은 자기가 치는 것이라고, 나의 엄마는 말하곤 한다. 나는 그때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비난하고 폄하했던 주변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대로 인생을 쌓아갔던 엄마에게 운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나약한 심리를 가진 사람들의 불안감, 신비감, 막연한 희망을 먹고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것이 일시적으로 심리적인 위안감을 줄 수 있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잠깐의 흥미는 줄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인생은 언젠가 내가 말했듯이 그저 빈 도화지에 내가 그려가는 그림인 듯하다. 밑그림이 그려진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아무것도 없는 빈 도화지에 때로는 힘이 들겠지만 자유롭게 내가 믿고 싶은 대로 그리는 그림이 내 인생인 게 다행이다.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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