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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Dec 23. 2023

신을 확신한다는 모순

자신을 알기도 어려운데, 신이 그렇게 쉬운가?

늘 믿어 왔던 것이 깨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미 깨져버린 것이 그렇지 않다고 믿는 것은 또 어떤 것일까? 인간에게 믿음은 중요하다. 그것이 신에 대한 것이든, 자기 확신에 관한 것이든 말이다. 믿음은 단순히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를 포함하는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믿음과 종교는 동의어가 아니다.


주변에 대부분 종교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몇몇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로 오랫동안 보험을 강요하는 영업인들처럼, 상대의 반응에도 상관없이 끊임없이 관련 영상이나 링크 등을 매일 정기적으로 보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한두 번 읽음 처리를 하고 정중히 나의 신관을 밝히고, 그럼에도 계속 성가시게 나의 시간과 주의를 빼앗으면 수신을 차단하는 수순을 밟는다. 상대는 보이지도 않는 신을 강요하려다가, 옆에 있는 사람도 잃어버리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종교는 반복적인 것을 의식에 주입함으로써 세뇌라는 것을 거치게 된다. 세뇌가 아니려면 반복된 어떤 의식을 떠나 있을 때에도 자유롭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해야 한다. 세뇌가 거듭될수록 사람의 인식의 폭은 좁아지고, 세뇌를 조장하는 대상의 요구를 받아들이기 쉬운 단순한 상태로 변화되기 마련이다. 이 세뇌의 과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영양제처럼 외부 다른 생각으로부터의 차단이라는 부가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종교적 세뇌가 가장 용이하게 일어나는 곳이 고립되고 폐쇄되어 사람이 외롭기 쉬운 상태에 있게 되는 타국 만리나 섬과 같은 작은 커뮤니티라고 할 수 있다.


한 친구가 최근에 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외롭고 대화가 차단된 그곳에서 다시 종교병이 도졌는지, 나에게 종교와 관련된 설교 링크를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나도 종교를 가지고 있던 적이 있었기에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그 종교를 다 버리지도 않았기에 가끔 '좋아요'도 눌러주고 공감을 한다는 예의상의 반응을 해주었더니, 그 종교와 결부하여 나를 은근히 판단하고 정죄하고 개선시키려는, 미미한 가스라이팅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분명히 '나를 위한다'는 좋은 의도로 본인이 좋고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에게도 추천하려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종교적인 내용과 친구의 가스라이팅이 '미미한 성가심'의 정도에서 그다음 단계의 '경고'신호로 강등되고 있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가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 설교링크들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료해 보여서 어느 정도 가스라이팅에 익숙해진 종교 신도들의 마음을 부리기에 적절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설교 링크들을 보면, 고작 세상의 제도로 설교자나 종교자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신에 대해 온갖 것들을 확신한다는 어조로 교리를 중무장하고,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들의 신이 옳다는 절대적인 기준만으로 근거도 없이 합리화되어 있으며, 그 종교에 전파를 당하는 모든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다. 신이 본인아는 게 아니라, 본인이 신을 알며, 신이 주변 다른 사람들까지도 본인의 기준에 합하여 그렇게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라는 '근자감'에 가득 차있다. 그것이 바로 모순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신은 아무도 본 적이 없다. 그건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신도, 부처도, 단군신화에 나온 사람이 된 곰도 본 적이 없다. 그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전해진, 모든 것이 신이 맞다는 전제하에 합리화된 역사가 교리로 포장되어 있다. 죽이는 것도, 전쟁도, 못된 짓을 하는 것도 신이 했다고 하면 다 합리화가 되는 것처럼 포장될 뿐이다. 세상은 신이 무엇을 지시하고 개입했다 하지만, 그걸 증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신이 있다 하더라도 신은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확신하고 안다'라고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오만이고 판단이라는 말이다.


나는 신이나 신적인 존재가 있다고, 말 그대로 믿고는 있지만, 나는 신에 대해 모르므로 내 안에서 그 믿음이 막연하게 있을 뿐이지, 신이 어떤지, 뭘 생각하고 기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냥 그 신은 내가 믿으니까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그 무엇일 뿐이다. 신은 얼마나 웃기는 존재인가 하면, 내가 믿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그런 무엇이다. 여태 그 실체가 증빙된 적도 없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안 믿는다면 그 신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신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안 믿음으로써 없애버리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이 안 믿는데 신이 어디서 나타난다는 말인가? 물론 막연한 믿음이 실제로 힘을 발휘할 때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신이 그랬다는 걸 아무도 증명할 수 없다.


인간보다 위에 있어야 하는 신을 그 밑에 있는 인간이 다 알고 확신한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불경스러운 일이 아닐까? 나는 신을 모른다. 있어서 세상을 더 좋게 하기만 한다면 좋겠지만, 신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온갖 종교 전쟁과 추악한 일이 일어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타국에 있는 친구는 어제 새벽에도 내가 지하실에서 배를 만드는 설교에 나온 실패한 사람처럼 될지도 모르니 강물이라는 신 옆에서 배를 만들어야 한다는 설교를 빗대어 말을 했다. 그 설교를 말한 '오만방자한 인간'을 쫓아가서 따지고 싶다.


물 없는 지하실에서 배를 만드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술가이다. 그 배를 강가 옆에서 만드는 사람은 조선소 사장이거나 배를 만드는 기술자(장인)이다. 그게 예술가와 장인의 차이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설교자는 감히 배를 성심껏 만드는 그 사람을 '실패자'라고 언급했다. 어떤 '주리 할 놈의 설교자'인지 남의 인생을 '실패'라고 표현한 그 창의성 없는 인간의 오만한 편견과 판단을 따져 묻고 싶었다. 배를 강에 띄우는 것에 목적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배를 만드는 과정에 온전히 몰입해서 행복한 사람의 관점이 다르다. 인생에서 실패는 어떠한 일에 대해 본인의 양심의 가책이나 즐겁지 않은 시간으로 자신의 인생을 채우는 일이며, 주체적이지 않은 '남의 사고'로 자신의 머리를 채우는 일이다.


신에 대해 인간은 몰라야 정상이고 신과 믿음은 남에게 가르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신을 모른다. 나 자신이 사각턱인지 둥근 턱인지도 여태 몰라서 매일 거울을 보면서도 궁금해하고 있는 내가 도대체 믿기지도 보이지도 않는 신을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신을 안다는 그 모든 사람들이 다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다. 신이 긴 머리에 신발을 신고 다니는지, 머리를 밀고 다니는지 나는 본 적이 없어 모른다. 신은 내가 다 알 수 없기에 신이다. 그래서, 인간이 신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신이 알아서 인간을 위해 일하고 다가오는 게 이치에 맞다. 얼핏 듣기에 서양의 신과 한국의 신의 차이점은 서양의 신은 신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개념이고 국내의 무속신은 그나마 인간을 위해 신이 존재하는 양상을 띤다고 들었다. 어쩌면 한국의 신이 훨씬 더 따뜻하고 인간을 위하는 것처럼 들린다. 둘 다 알려진 바 없지만 말이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남에게 자신의 믿음과 신을 강요하지 않기를 바란다. 막연하나마 상대의 믿음을 근거도 없이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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