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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Jan 01. 2024

20240101

제목 없는 날들을 시작하며

영문출간을 알아보며 직접 번역을 시작했다. 해외출판 경로는 아직 아는바 없지만 우선 완성된 원고가 준비가 되어야 뭐라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장에서 이미 베스트셀러인 경우 더 수월하겠지만, 내 글은 그런 국내 베스트셀러와는 결이 다르고, 추구하는 독자층도 다르기에 길을 직접 내면서 가야 한다. 그래도 가끔 내 글을 읽고 싶어 하는 외국인 친구와 지인들이 있기에 그런 비슷한 결을 가진 독자들에게 내 글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언젠가는 갑자기 다양한 글의 조회수가 한동안 많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국내에 살고 있는 외국인 지인이었다. 그는 한글로 된 글을 읽고 싶었는데 내 글이 자기가 찾던 글이라 며칠 동안 재미있게 읽었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내  글이 어렵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는 데다가, 소위 말해서 요즘 잘 팔리는 글의 트렌드와도 거리가 멀어서 외국인에게 더 읽기 힘들지 않았는지 걱정했는데, 그는 본인의 취향에는 맞는 글이라 한글이 많이 어려운 부분은 번역기를 돌려서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그는 유럽 쪽에는 이런 글의 독자층이 있을 거라고 해서 동기 유발이 되었다.


번역은  정말 중노동이지만, 말 그대로 내 글이기 때문에 남에게 내 마음을 세심하게 서술해달라고 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번역료의 문제도 있겠지만, 한영 문학번역인 경우 이를 진행할 적절한 사람을 어디서 찾기도 힘들고,  글의 흐름이나 뉘앙스가 원문과 비슷하려면 서툴러도 작가가 직접 손을 대는 것이 가장 좋다는 생각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추후 내 원문과 대조해서 검토해야 하는 경우 이에 걸리는 시간은 더 지겹고 더 많은 신경이 쓰이게 된다. 할 수만 있다면 특히 실용서가 아닌 문학인 경우, 좀 미련해 보일지라도 작가가 직접 해당언어로 자신의 글을 재창조하는데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예를 들면, '늪'에 대한 단어가 여러 개 있는데 어떤 단어로 쓸지는 그 단어를 쓴 작가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영한번역인 경우 감수까지도 가능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한영번역인 경우 그래도 문학인데 전문 원어민 출판 에디터가 최종 편집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적절한 사람을 고민하다가 미국에 사는 작가 지인 두 명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중 한 명에게 우선 번역한 원고를 보냈는데 글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에디팅 및 문학저널에 출판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런데 내 글에 대한 여러 코멘트 중에서 웃겼던 한 부분이 무라카미 류의 작품들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그의 작품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 읽으려다가 도무지 읽히지가 않아 결국 비싼 냄비 받침대로 쓰기로 했다는 글을 브런치에 쓴 적이 있다. 지금 다시 몇 문장 더하자면 그의 작품은 읽히지도 않고 지루하고 큼큼하고 지지부리한 냄새가 난다. 7~80년대 어느 오래된 판자촌 구석의 방에 지지리 궁상으로 혼자 세 들어 살고 있는 남자 대학생이 글로 뭉개져 종이 위에 까맣게 환생한 느낌이랄까. 책의 표지를 여는 것이 때 묻은 그 남자 대학생의 '자취방'의 문을 열어보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게 왜 싫은지 모르지만 아무튼 추잡스럽고 며칠 안 감은 더벅머리의 전혀 세련되지 못한 20대의 별생각 없는 보수적인 남학생이 생각난다. 오래된 드라마 '아들과 딸'에 나오는 '귀남이'와 그 조무래기 친구들의 그저 그런 시시한 일상과, 느끼하고 추레한 눈빛의 느낌과 비슷해서 책을 덮어버리게 된다. 아무튼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도무지 한 페이지도 나아가기 힘들게 만드는 힘겨움이 있다.


나는 에디터 지인에게 회신 메일을 보내며, 그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가장 지루한 책의 저자이고 내 글하고 어디가 어떻게 관련이 있어 보이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아마 그가 아는 동양인 저자가 무라카미 밖에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랬더니 그는 '노르웨이의 숲'은 본인도 지루해서 읽지 않았지만 다른 책은 재미있게 보았다며 그의 다른 책도 읽어보라고 권했다. 하필 내가 그의 작품 중 가장 지루한 걸 먼저 읽어서 그런 걸까 싶어 당장 그의 책을 몇 권 골라 들어 오늘은 독서를 하며 보내리라 작업실에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 나는 다시 무라카미 작가의 다른 책 위에 방금 끓인 짜장라면 냄비를 얹어 놓고 먹는 중이다. 작업실에서 춤이나 출걸 그랬다.


나는 그렇다고 남들이 다 좋다고 느끼는 작가를 나쁘다고 판단하거나 나처럼 작가를 폄하할 것을 바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거의 아무도 안 읽는 내 글은 뭐 대단한 것이라고! 내가 가진 기존관념과 관점이 있을 것이고 남들의 다른 시각이 다양함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가 어쨌든 잘 팔리는 작가이니 나름 훌륭한 작가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 현재의 관점과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걸 왜 읽고 있나 싶어 도저히 시간을 할여하고 싶지 않아서 덮어 버렸다. 돈 버렸다 싶지만 읽고 시간을 더 쓰느니 안 보고 멈추는 게 이익인 듯했다. 아깝다고 먹어서 배탈이 나느니 그만 먹고 버리는 게 나을 때도 있을 것이다. 밍밍한 물을 계속 들이켜는 것도 같고, Ai로봇을 시켜서 아무나의 일상을 그저 계속 나열하도록 시키면 무라카미의 작품들과 비슷한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나올 것 같다. 그의 작품을 물에 비유한다면 시멘트 바닥에 어쩌다 쫄쫄 흐르는 얕은 물처럼 느껴진다. 나는 강물과 바다처럼 깊고 심오한 게 좋다. 나름 문학도 전공했고, 남들 지루해하는 윌리엄 폴크너와 같은 미국 남부문학 작품들은 너무나도 재미있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무라카미의 작품에 대해 뭔가를 느끼기엔 내 역량이 너무 부족한 것 같다. 


그냥 proofreading 정도만 검토하고 내 선에서 번역을 완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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