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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Jan 11. 2024

기술과 작품, 그리고 저작권 (1)

도구와 작품

Ai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단계가 되었는데 그 수준이 상당히 발전했다. 나름 최신 동향을 놓치지 않고 있다가 최근 3년간 관련 뉴스와 근황을 많이 보지 않고 있었는데, 그 3년간 정말 어마어마한 속도로 발전이 된 것을 요 며칠 깨달았다. Chat GPT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또한 그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다른 Ai 앱들을 일부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내 컴퓨터에 깔린 어도비 CC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하고 보니 거기에도 죄다 Ai 기술이 통합되어 있었고, 다른 앱도 모두 비슷한 기반으로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정말 '아차'하는 사이에 기술의 발전상을 대거 놓치고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3년 전만 해도 기술이 별로 상용화될 만큼 농익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부정적으로만 보였기 때문에 몇 년은 더 기다려야 이를 나도 쓸 수 있게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최근 기술의 발전상을 다시 찾아보다 보니 기술의 부정적인 면보다 가능성이 더 많이 보여서 많이 신나 있었다. 그러다가 인스타그램의 스레드 (Thread) 앱에 한 작가(상업인?)가 Ai 그림을 자신이 그린 것으로 위장해 온라인상으로 그림판매를 하다가 그것이 실제 자신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것에 비난을 받으면서, 그림을 주로 그리는 작가들 간의 토론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위기감과 함께 작품에 대한 기존 관념을 고수하고자 하는 보수적인 기운도 감돌았다.


우선 Ai 저작권에 대한 논쟁을 시작하기 전에 본인이 안 그린 걸 직접 손으로 그렸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사기이며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논란은 Ai를 사용한 것을 작품으로 인정할 것이냐의 쟁점이었다. 나는 당연히 작품의 재료는 한국 미대생들이 주로 편협하게 알고 있는 연필 데생, 수채화, 유화기법 등을 통해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기술력만을 함양하는 그런 범주를 넘어서 모든 것이 다 작품의 재료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건 2024년에 한국에서나 주로 있을 법한 시대에 뒤처진 논쟁이다. 아마도 한 가지만 파고들어야 제도가 유지되는 협회나 단체 중심의 기성 집단이 붙들고 있는 때 지난 시대의 산물과 같은 것일 것이다. (진정 후대를 생각한다면 사고가 멈춘 기성세대들은 자신의 직위를 내려놓고, 교육제도를 바꿔서라도 시대를 받아들이고 가능성을 넓혀주는 열린 세상의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 물론 인간 본성이 그리 이타적이지 않으니 이상적인 바람이라고 해두자.)


민감한 문제는 Ai 저작권에 대한 부분이다. 이건 여러 관점이 있기에 하나로 정답을 말하기 꽤 힘든 부분이다. 하지만, 이들을 다 짚어보고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현재 기존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Ai 솔루션에 출처를 다 밝히라는 등, 그에 대한 저작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등의 의견이 많다. 나는 그것의 의미는 이해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외국 법원에서 어떤 판결이 나왔든지 간에 그건 제도나 그것의 판결을 내린 한 사람의 얘기이고, 그 이면의 얘기를 해보고 싶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꽤 오랫동안 고민하고, 저작권법에 대한 워크숍도 듣고, 실제 이와 관련해서 여러 번 동료나 제도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도용이나 모방이란 단어는 경기를 일으킬 만큼 지긋지긋한 말이고 그런 사람들은 정말 겨울바다에 빠뜨리고 싶을 정도로 혐오한다는 것을 우선 말해두고 싶다. 돌아보면 아직도 이해 못 할 부분도 많고, 이제야 이해가 되는 부분도 많이 있다. 한도 끝도 없는 생각의 과정 속에서 내게 인상 깊게 던져졌던 문장 몇 개를 꺼내어 나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던져보고 싶다.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당신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게 있었나요?"


내가 여러 고민이 있었을 때, 앞뒤 설명 없이 내가 받은 상대의 질문이자 대답이었다. 이런 질문은 평생에 걸쳐 종소리처럼 불현듯 뇌리에 스치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좋은 선생의 가르침은 종소리와도 같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일 것이다. 아마 그 선생님은 내 고민을 알고 또 겪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입밖에 내기에는 이야기가 길어지고 논란의 여지도 있기에 당시에는 그런 식의 알듯 모를듯한 화법을 많이 구사했던 것 같다.


여태까지 예술가로서 '나만의 것'에 대해 끊임없이 내면의 대화를 거쳐왔다. 자라면서 '나만의 공간'을 꼭 갖고 싶어 일찍 집을 나와 독립생활을 했고, 고유한 존재감을 지닌 예술가들이나 서태지와 같은 인물을 접하면서 '나만의 것' 또는 '나'라는 것에 대한 의문을 시작해서 여태 그 질문에 대한 여러 대답을 구하는 여정을 겪고 있다. 그런 인물들이나 작가를 보면 정말로 '나만의 것'이 있다고 지금도 확신하고, 가장 자신을 닮아있는 예술가나 작가는 내게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제시해 주었다. 그건 흔히들 얘기하듯이 예술도 유행이 있다는 등, 흐름을 타야 한다(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고, 모르는 인간들의 웃기고 있는 얘기라고 생각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깡그리 무시하고, 내가 추구하는 것의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코어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나도 언젠가 잃어버린듯한 나를 찾아, 나랑 가장 닮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 '나'라는 오리지널러티를 찾고 싶어 여러 경험과 지식의 문을 방문했다. 최근 유행어처럼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한 문구를 써서 비슷한 여정을 시작하는 것을 많이 보는데, 나는 유행 때문이 아니고, 더 오래전 신호등을 건너다가 문득 그 깨달음이 왔다. 그 이전에도 인류의 생애에서 자신을 찾고 싶지 않았던 때가 없던 사람들은 없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깨달음의 순간 이후부터 사회적 갑옷을 떼어내려 무던히도 노력해 왔다. 분명히 '나'라는 오리지널러티는 존재하고 그것이 가장 강력한 창의적 산물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하면 내가 만들어낸 내가 아니라, 원래 타고난 나를 발견하고 그것대로 사는 것, 사회의 제도와 환경의 구속에 묻혀있는 나를 되찾아 신이 만든 그대로의 내 모습, 그 원형을 발견해 보는 것이 내 생의 구심점이 되어 왔다. 나와 신(종교적 용어로써가 아닌)의 관계, 작품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다시 위의 질문을 생각해 보자.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당신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게 있었나요?"


참으로 심오한 질문이다. 분명히 나만의 것은 있다. 당시 이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욱'하고 뭔가 올라오면서 열부터 받았다. 우리는 '나'라는 의식을 하고 살기 때문이고, 분명히 타인과 구별되는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건 또 다른 긴 이야기의 주제이지만 여기선 생략하기로 한다. 그렇지만 질문자의 의도를 Ai 앱의 저작권을 논하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나'라는 존재 자체의 내재된, 혹은 타고난 고유한 오리지널러티와는 별도로, 태어나면서부터 배우는 언어, 지식, 글의 형식, 그림체, 그림의 다양한 기법, 작품을 해석하는 관점, 문장, 단어 등은 모두 남의 것에서부터 왔다. 우리는 그 출처를 일일이 다 알 수 있는가? 또한 그것에 대해 일일이 출처를 밝히고 사는가?


스레드 앱의 많은 답변자들이 Ai로 그린 작품은 Ai가 저작자이고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Ai가 그려준 그림이라 해야 한다고 했다. 일부는 동의하지만, 일부는 동의하지 않는다. 일부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작품'을 보는 편협한 시각에서이다. 국내에서는 심지어 아직도 사진조차도 예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황당한 소리를 접한다. 재료를 무엇을 쓰던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서 작품이네 아니네를 따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도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던지 말던지도 내 알 바는 아니다. 도구는 선택의 문제이고 장인정신은 창작과정의 어느 부분에 집중해서 발현할지도 마찬가지이다. TV를 손으로 일일이 조립해서 만들어야만 제작자라고 할 수 있다고 고집하는 말처럼, 쌩 '바보, 멍청이'같이 들리기에 재고할 여지도 없다. 물론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도 많이 눈에 띈다는 것이 환장할 노릇처럼 그저 답답하게 느껴질 뿐이지만, 그건 무지한 대중(많은 사람들)의 속성이므로 내가 통제할만한 것도 아니다. 단세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다각적 사고와 인지를 하는 사람의 시야를 이해하고 소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건 이미 여러 사회 현상으로도 증명이 된 바 있으니 말이다.


이들의 사고에 의하면 Ai라는 도구는 빠르고 힘이 덜 드니까 재료나 기법으로써 인정이 안되고, 본인들이 쓰는 물감이나 연필이나 오일 같은 것들은 수작업의 고생이 더하니 작품의 도구로 인정된다는 말인가? 그간 은 비슷하게 무지한 의견 중에는 '성의'라든지 '물감색을 꼭 섞어서 써야' 좋은 작품이라는 답답한 말도 있었다. 오일과 Ai 모두 사람의 말, 손기술, 조작, 계획,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도구일 뿐이고 그 도구에 명령을 내린 것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없었으면 나오기가 불가능한 결과물이란 의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도구 자체는 작품이 될 수 없다 (그것도 모를 일이다. 그 도구를 만든 사람은 작품 이상으로 세심한 신경을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품이라고 주장하면 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사인을 하든, 작품이라 말하든, 전시관에 가져다 놓던지 하는 최소한의 의도나 조작적인 행위가 있어야 그것이 타인이 인지 가능한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물감이 스스로 걸어 나와 전시관 벽에 걸리지는 않을 것이지 않는가? 그 최소한의 의도나 행동은 해당 작가의 창작물이라고 본다. 쉬우면 작품이 아니고 어렵게 생고생해서 그려야만 작품인가? 그런 사고방식은 옛날 영화관 실사 간판이나 그려대야 할 사람의 생각과 똑같다. 사람이 그려댄 영화간판은 덕분에 오래전에 없어졌다. 같은 물감이라고 같은 작품이 나오지 않듯이 같은 명령어가 아니면 Ai이라고 해도 같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그 명령어라는 문장과 발상은 분명 그것을 조작한 작가의 저작물이다. 예를 들면 안무에서는 안무자가 직접 춤을 추거나 움직임을 만들어주지 않아도, 그 인무작품의 기획과 진행을 이끄는 아이디어 발상자로서 창작주체는 안무가인 것이고, 앙드레 김이 모든 공정을 직접 손을 대지 않았어도 그의 결정과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은 앙드레김의 이름이 붙는다. 물론 가능한 모든 출연자들과 제작자에 대한 크레디트가 존중되긴 하지만, 그렇지 않고도 허용되고 묵인되는 부분이 많다. 앙드레김의 주문과 선택, 안무자의 아이디어의 주문과 실행과 선택이라는 언어가 없었다면 작품의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뼈 빠지게 노동을 한 것이 무용수라서, 아니면 재봉사들이라서 작품도 아니고 작품의 주체가 무용수와 재봉사들이라는 얘기는 어불성설이다. 물론 이들의 기여도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작품의 주관자와 창작자의 타이틀은 안무가와 디자이너가 가져가기 마련이다. 그 콘셉트를 잡고 기획을 하는 것 자체도 경험과 사고와 고민의 산물이다. 생각을 그림으로 하든, 움직임으로 하든, ai로 하든, 사진버튼 하나로 하든 그 모든 건 창의적 사고의 산물, 즉, 창작물이다. 사진사가 버튼 하나로 대작이 나오더라도, 그 이전에 아주 오랜 기간 관찰과 사유를 하고 수천번의 다른 버튼을 눌러서 결과된 한 번의 버튼일 것이다. 그렇게 쉽게 만들어내서 돈을 번다는 그 생각을, 왜 다른 사람들은 미리 하지 않고, 누군가 그걸 해 보였을 때 누구나 할 수 있으니 쉽다고 비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콜럼버스의 계란처럼 말이다.


그 외에도 수도 없이 많은 다른 예들이 존재한다. 사람이 하던 그 1차적인 과정을 기계나 기술이 대신한다고 해서 그 결과물의 저작물을 기계나 기술이 주도했다고는 볼 수 없다. Ai의 역할은 스스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사람의 기획의도와 명령에 따라 1차적인 과정을 대신해서 효율성과 시간소모를 향상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엄청난 재능을 지닌 기술을 도구로 사용한 것이 꼭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나도 물론 여러 프로그램과 기술력이 놀랍고 이제 시각예술은 다 망한 것같이 잠시 충격이 느껴지는 중이지만, 그냥 다른 작품일 뿐이지 기존의 회화나 전통방식이 무시되지도, 그에 비해 기술을 활용한 작품이 꼭 우월하게 결과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 겁먹지 않았으면 한다. 빨리 뛰는 자동차가 나왔다고 해서 인간이 달리기를 멈추고 자동차와 달리기를 한다거나 하는 일이 나오지는 않았으며, 신시사이저가 아날로그 악기 흉내를 낸다고 디지털 전자피아노를 아날로그 그랜드피아노에 견주어 경쟁하듯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지는 않지 않는가? 쉬운 것은 쉬운 것대로 미비한 점이 있을 것이다. 오히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극단의 장인기술이 최신 기술과 균형을 이루면서 양 끝을 잡아당기고 세상이 달려가게 될 것으로 짐작된다. 조금 불리한 점이 있다면 어설픈 것은 기술의 상업화(효용성과 시간단축)에 떠밀리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창작자는 돈을 버는 자본주의적 결과물로 창작의 방식을 바꿔, 말 그대로 '트렌드'라는 것을 따라 돈과 인지도를 쫓거나, 순수 창작자로서 도구를 막론하고 자신이 좋아하고 만족하는 '좋은 작품'을 만드는데 매진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두 방향 모두 장단점은 존재할 것이며, 기계로 찍어낸 도자기와 손으로 빚어낸 조선백자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 백자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내면 그만이고, 어차피 조선백자와 같은 작품을 만드는데 자신이 없는 창작자는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도구로 사용한 작품을 만들어도 딱 그만큼의 결과밖에 낼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도구를 써도 보는 눈과 의식이 딱 그만큼일 것이기 때문이다. (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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