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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Feb 08. 2024

나이 든 새

세상의 모든 엄마는 아이였다


나이 든 새는 날지 않는다

나이 든 노모가 더는 걷지 않듯이

나이 든 새는 저 혼자 숨어서 노년을 맞는다

걷지 않는 노모는 신발을 손에 쥐고 잠이 든다


찬기 어린 방에서 이불을 움켜쥐고

꿈 안으로 달아난다

꿈속에 뭐가 있어요?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더는 기다리지 않는 애들이 보여

꿈은 눈물 한 방울을 세상에 보낸다

엄마가 보고 싶어

노모가 소리 없이 중얼거린다


웅크린 노모는 바싹 마른 한 줄기를 의지해서

씨를 품은 채 찬바람을 맞고 선

의지를 소진해 버린 퇴색한 갈대처럼

멍하니 사라져 가는 세상을 바라본다


뚝, 뚝, 뚝!

무심한 발걸음이 그마저 부러뜨리면

그는 다시 생명이 된다

그리고 다시 우리 곁에 온다

아이가 되어

갈대가 되어

다시 작은 새가 되어......




수많은 새들이 어디에서 생을 마감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새들은 늘 살아서 날거나 물 위를 서성일뿐, 그 많은 새들은 어디에서 노년을 맞이할까? 새들의 무덤을 본 적이 없다. 사람들만이 죽을 때 삶보다 더 '거창한' 족적을 남긴다. 산을 뒤덮는 무덤이 되고, 비싼 비석이 되고, 해마다 상 위의 네모난 틀 안에 올라타서, 먹지도 못할 음식을 차릴 것을 요구한다. 어느 보험회사 직원이 말하기를 사망보험금을 책정하지 않아 남은 가족들에게 비싼 장례금을 치르게 하는 것은 '민폐'라는 논리를 펼쳤다. '빌어먹을 인간들!' 욕이 나올 뻔했다. 사람이 죽는 것에 앞서 자본주의적 관점의 '민폐'를 떠올리다니. 그래서 생각해 봤다. 죽음에 대해서. 


<나이 든 새>는 우리 엄마에 대한 글이 아니다. 

우리 엄마의 엄마에 대한 글이다. 

몇 년 전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개를 사람이 앉는 소파에 앉았다고 쫓아내다가 거실 바닥에 미끄러졌다. 덕분에 고관절이 부러진 할머니는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개를 원망하면서 돌아가셨다. 우리 식구들에게 개는 나보다 서열이 높은 상전이었고, 그 소파는 원래 그 강아지 것이었다. 


할머니는 예쁘고 착했고, 평생 남편과 자식들과 다시 그 자식들이 낳은 자식들을 위해 살았다. 그 자식들은 자기들의 자식들만 챙기고 사랑은 아래로만 흘렀다. 할머니는 집에서 가장 큰 안방에서 할아버지와 살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들자식 내외와 방을 바꾸더니 나중에는 그 자식들의 자식들에게도 방을 내어주고 결국은 그 집에서 가장 작은 방에서 살았다. 할머니는 늘 괜찮다고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집을 굴러온 돌처럼 차고 살던 자식은 새가구와 가전제품을 사서 더 큰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 집은 원래 할머니 것이었는데, 할머니는 변변찮은 아들 내외를 들이고 남의 것처럼 그 집에 얹혀살다가, 결국은 가족이 불어나 그곳의 가장 작은 방도 차지하지 못하고, 낯선 남의 건물 한 귀퉁이 침상에서 돌아가셨다. 그래도 퍼그 강아지 말고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거동도 못하고 누워있는 줄도 모르고 오래전 미국으로 이민 간 이모는 할머니를 생각하는 양, 미제랍시고 가죽 샌들을 보내왔다. 할머니는 그래도 딸이 준 신발이라고 신발장에 신발을 모셔두고 내내 딸을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신발만 보면 무심한 이모가 한없이 한심해 보였다. 할머니는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서 자식과 손자들에게 삶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여력을 다 내주었는데, 그 자식들은 할머니는 이미 떠나가고 난 장례식만 남들 눈에 위신이 상하지 않게 거나하게 치렀다. 나는 내가 죽을 때, 내가 살아있었을 때 나에게 베푼 것보다 더 돈을 들여 누군가가 내 장례식을 치른다면 벌떡 일어나서 거기에 있는 모든 이들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차 버릴 것이다. 아니, 육개장 사발을 사람들 머리통 위로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장례식을 돈 들여 치르고 손님 배불릴 육개장 차려낼 생각을 하지 말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잘해야 한다. 나는 살았을 때 초라했을 사람의 장례식이 사치스러운 이유와, 허례허식만 가득한 장례식 문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예전처럼 서로와 이웃에게 관심이 있지 않다. 발 빠른 자본주의 보험회사 직원의 말처럼 장례식, 누군가의 죽음은 '민폐'가 되어 누구나 기피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2024년, 명절과 장례문화도 허울 좋은 형식을 바꿀 때가 된 거 아닐까? 좀 더 솔직해질 때가 되었다. 


할머니는 혼자 쓸쓸히 누워서 내게 말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 할머니도 아기였고, 예쁜 딸이었고, 늘 사랑해 주는 엄마가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할머니는 공들여 키운 다섯 자식들이 더 이상 관심이 없는 것도 모르고, 멀리 짝 찾아 시집가고 장가 간 무심한 자식들을 늘 보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의 방을 차지하고, 누워있는 노모에게 여름 샌들을 선물한 자식들을 말이다. '할머니! 그 자식들 '자식들'이야! 할머니 안 보고 싶어 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이를 낳아 작은 방 한 칸 마련해서 당신의 엄마를 당신 자식들의 돌보미 엄마로 만들지 말았으면 한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도 자아가 있고, 여자이고, 자신의 삶이 있다. 당신의 삶은 빛나야 하고 당신의 엄마는 설거지와 청소와 아이 돌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당신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참 이기적이고 나쁘다. 사람들은 다 자신만큼 커다란 인생의 몫이 있다. 아직은 가장 큰 집의 가장 큰 방에서 살고 있는 (약간은 고약스럽지만) 엄마가 있어 다행이다.  나는 우리 엄마가 언제까지나 가장 큰 집의 가장 큰 방에 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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