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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Mar 30. 2024

드로잉은 계속된다

2024년 드로잉 프로젝트가 선정이 되었다

2024년, 이번 해에도 지역문화관광재단에서 지원하는 예술지원 프로젝트에 선정이 되었다. 선정된 것도 모르고 있다가, 오늘 우연히 발견했다. 지원제도가 창작에는 독이 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지원 마지막 날까지 지원을 할까 말까를 두고 망설였다. 스스로 옹졸해 보이기도 하고, 더 이상 이렇게 예술을 하면 안 될 것도 같고, 내 작품이 지원금에 비해 몹시도 과분하고 아깝단 생각도 하고, 혼자서 구시렁거리며 온갖 욕을 거실 허공에 대고 바가지로 퍼붓기도 했다. 역시나 마감 30분을 남겨두고 나의 친구 유진(가명)이와 통화 후 마음을 바꾸어 지원을 하게 되었다. 친구는 늘 머리 아픈 고민을 가볍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 친구의 명언은 "아무도 작품에 대해 신경 안 써, 그냥 대충 해서 내!"였다. 그렇다. 예술가인 나는 지원서를 쓰면서 자신의 작품에 너무나 몰입해 간다. 친구는 나를 깊은 우물에서 꺼내어 주었다. "그래, 될 대로 돼라!" 결과는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었다. 돼도 골치가 아프고, 안 돼도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다른 널려 있는 세상의 많은 지원 건에 대해 기웃거리는 시간 낭비는 많이 하지 않기로 한다. 차라리 그 시간에 놀거나 작품을 하면 열 배는 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무도 지원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주최자도, 이를 진행하는 이들도. 그냥 제도가 거기에 있으니 다들 뭔가 거기에 매달려 각자의 역할을 해낼 뿐이다.


지원서를 쓴다는 것은 꽤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다. 특히 아무것도 없는 미래를 미리 내다보듯 결과를 예상하고 구체적인 기획을 해야 하는 부분에 있어 창의성을 미리 제한하게 된다. 이 과정은 시간이 아까운 예술가에게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창작과 창의성의 이론에 대해 알리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를 설명하기란 정말 힘들다. 하긴 예술 지원 제도만 그런 게 아니라 온 나라가 대부분 창의성을 죽이는 방향으로 제도를 운영 중이다. 창의적인 사람은 한국에서 살기가 힘들다. 스스로 바보 코스프레를 하고 살아야 겉으로나마 아주 조금 어울려 살 수 있다. 나는 그래서 몇 해 전 '바보 book'이라는 나의 아트북 시집을 출간했다 (나는 내 글이 너무 재미있어서, 몇 번을 읽어도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읽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내 글이 제일 재미있다. 뭐 어쩌라고!). 자신이 자신으로 살 수 없는 건 고통스럽다. 그런데, 앞으로는 점점 더 과감하게 그러지 않기로 한다. 그게 바로 올해 내 삶의, 그리고 내 작품의 목표이다. 좀 더 과감하게 내가 되는 것.


이번 드로잉은 그래서 <선 넘는 드로잉 Drawing Beyond Lines>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실 제목 따위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내 모든 작품은 그냥 '나'이다, 내가 보는 관점, 내가 느끼는 것, 내가 이해한 대로의 세상과 삶, 그걸 그냥 뭘로 든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작품은 그냥 내 이름 석자이다. 음악가들은 그냥 작품 번호 만으로도 작품이라고 내세우며 잘도 사는데, 왜 다른 예술작품들은 제목을 붙여야 소통이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추상화된 코드와 음표로 쓰인 악보는 제목을 햄버거라고 붙이든, 가을바람이라고 붙이든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스파게티라고 해서 국수 면발이 등장하고 햄버거라 치즈를 연상하는 무언가를 꼭 음악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소나타 저것도 소나타, 그래도 음악 자체가 이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제목이 별 의미는 없다.


내 작품은 그냥 <내 이름>인데 이렇게 쓰면 사람들이 대부분 아주 싫어한다. 심지어는 내 이름을 붙인 우리 부모님도 작품 제목이 뭐냐고 해서 <내 이름>이라고 하면 이젠 '아주 듣기도 싫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을 내 작품에 붙이는 것에 대해서 조차 약간의 뻘쭘함과 소심함이 생겼다. 내 책도 나이고 내 그림도 내 스튜디오도 나인데 그럼 어쩌란 말인가? 왜 다들 내 이름은 싫어하고 '소나무', '줄리엣', 뭐 이딴 이름은 괜찮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드로잉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번에도 나를 훨씬 더 멀리 뛰어넘고 싶다. 최근에 깨달은 것이지만, 나를 제한하는 것은 사실 나였던 것 같다. 내가 스스로 그려 놓은 수많은 선들, 그리고 나의 외부에 존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수많은 기준과 선들이 사실은 대부분 나의 지레짐작한 두려움과 소심함이 만들어낸 상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달팽이'라는 소재에 대해 춤, 글, 그림 등으로 연작을 만들고 있다. 최초의 달팽이 작품을 만들 때부터 소심한 달팽이 같았던 나를 이겨내고 싶어서 만들었던 건데, 달팽이 작품을 많이 만들어도 나는 늘 머리를 느리적거리며 내밀었다가 쏙 들어가 버리는 달팽이와 같은 나의 두려움과 소심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인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엔 좀 더 과감하게 내 몸을 쑤욱 내밀어보려고 한다. 이미 '민달팽이'란 작품을 만든 지도 오래되었는데, 나는 여태 다시 껍질 안으로 들어가 살고 있는가 보다.


우선은 내가 인지하는 온갖 선(lines & boundaries)들을 가시적으로 다 꺼내어보려고 한다. 설치물이든, 그림이든, 색채이든, 몸이든, 춤이든 모두 드러내고, 이후 그 선들을 확장하고 그로부터 자유하고자 한다. '자유'! 그래, 난 자유롭고 싶어서 이 모든 여정을 시작한 건데 스스로 내 주변에 선을 그어 나를 옭아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선을 넘어보자, 나를 넘어보자' 다짐해 본다. 나는 내 맘대로 할 거야, 이번엔 더 눈치 보지 않을 거야, 타협하지도 않을 거야,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방식대로, 흔들리지도 않고, 그냥 자유할 거라고!


-창작과정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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