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선 Aug 21. 2024

교정치료와 나의 그림

왜 다 뒤를 돌아보고 있지?

나는 일상의 매 순간을 지나며 다양한 것들에 대해 창의적 영감을 받는다. 나를 화나게 하거나, 아름답도록 느끼게 하거나, 웃기게 만들거나, 졸린 사람을 보거나, 말을 더듬는 사람을 보거나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한 강한 인상이 내 작품에 스며들게 된다. 그림들을 보면 당시 나의 삶에 대해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드러나는 것 같다.


원래 나는 현재의 그림들을 그리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예상했던 방향과는 매우 다르게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물론 그런 '돌발적 변이?(deviation)'이가 창작에 있어서의 묘미이자 스릴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잘못하면 망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내가 상상하는 역량보다 더 큰 무언가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아는 범위 이상의 것에 도달하게 된다면 나의 영역이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통제와 통제불가능함이 교차하는 과정이 창작의 과정이고, 더 나아가서는 창조적 삶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가끔 통제 불가능하도록 인생을 여유 있게 기다리며 바라볼 줄 아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그린 드로잉 중 노란 토끼 한 마리가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내가 그린 드로잉 중에서 가장 시시하고 별로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작업실에 들어오면 그 토끼에 시선이 먼저 꽂혔다. 그 작품은 최근까지 두 명이 사겠다고 했으나, 바로 그런 이유로 내 작품에 대한 욕심꾸러기인 나는 그 그림을 팔지 않기로 하고 집에 가져다 꽁꽁 숨겨 놓았다. 어떤 사람은 내게 계속 토끼만 그려보는 게 어떠냐고까지 했지만, 세상에 토끼를 그리는 사람들은 널렸고, 나는 뭐 하나만 계속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내가 그리고 싶은 때에 자유롭게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속으로 '좋으면 너나 그리세요'라고 말하고 무시했었다. 특히 토끼의 해에 사람들이 온 천지에 토끼를 그려대고 그와 관련된 전시가 많아서 (트렌드를 쫓는 작가들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걸 염두에 두고 그린 게 아니라 빙상장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떠올린 점프를 하는 토끼를 상상하면서 (사실은 내가 스케이트 탈 때마다 안 보는 척 멀리서 나를 부러운 듯 염탐하던 스케이트장 '좀비 아줌마'들을 토끼로 변신시켜 그린 것이기도 하다) 그렸는데 그것이 우연히 토끼의 해에 그려진 것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리고 한두 마리면 충분하지 무슨 평생을 뭐 하나만 주제와 변주처럼 (theme & variation) 그리는 사람들처럼 재미없게 그러고 싶진 않았다. 나는 무궁무진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말이 씨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올해 그림을 그리고 보니 토끼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토끼들은 봄에 산란을 많이 해서 번식력이 매우 강하다. 아마 그래서인가? 토끼 그림의 시초는 2016년 내 책을 출간하면서 그 안에 실린 작은 드로잉과 자작시였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에 대한 나의 다른 시각의 해석에 관한 것이었다. 그 토끼들에 색이 입혀지고 표정이 더해져서 토끼 그림들이 캔버스로 더 많이 더 크게 옮겨지게 되었다. 올해 토끼들은 나도 모르게 죄다 뒤를 돌아다보는 모습이 되었는데 왜 그러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로 치아교정 중이라 교정장치 때문에 툭 튀어나온 모습으로 묘하게 시시각각 변하는 내 얼굴을 잠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심리가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이 그림으로 나와 버렸나 보다. 그것도 희한한 게 그리고 나니 재미가 없어서 망한 그림이라고 뒤집어 놓았는데 그림을 본 두 친구가 재미있다고 버리지 말라고 해서 살려둔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두 친구가 '이거 너지?'라고 또 나를 닮았다고 했다. 나는 '이 폐기 직전의 졸작이 나라고?'라는 생각에 강하게 부인하고 싶었지만, 나라고 생각하니 정말 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머리통이 크다. 아니,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늘 내 머리통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또는 실제로 생긴 것보다 크게 내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다. 어렸을 때 나는 얼굴이 매우 컸고, 머리통이 커서 유치원 때 가장 큰 사이즈의 모자를 쓰고 다녔다. 집에서 늘 내 머리통이 크다고 놀렸는데, 실제로 몸이 다 큰 성인이 되어서는 내 머리통이 내 몸과 비례해서 그리 크지 않은 것임이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 한 번 박힌 인식은 바뀌기가 힘든 것 같다. 주변 어린아이들을 보니 어릴 때 다 머리통이 크고, 실제로 또래들보다 어릴 때 유난히 머리통이 큰 아이들도 자라면서 배우 김수현처럼 작고 날렵한 머리통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하필 내 머리통이 내 팔보다 길었을 그때 사람들이 오며 가며 내게 한 말들이 내게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아무튼 내 토끼들은 지금 큰 머리통을 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핑크색 몸통을 하고, 죄다 뒤를 돌아다보고 있다. 부인하고 싶지만, 내 모습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냥 사랑하기로 한다. 뭐 계속 보니 나름 정이 가기도 한다. 내 그림이니까 말이다.


내 그림 by 이영선. 대문짝만 한 캔버스에 큼직하게 그렸다. 원본의 색이 더 선명하고 이쁜데 화면상 색보정이 미흡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복되는 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