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 교정을 예상된 2년보다 훨씬 빨리 끝내고 오늘 장치를 떼어 냈다. 처음 교정을 하고 2년 후의 미래를 그려보았을 때 까마득했고, 나도 주변의 사람들도 많이 변해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치아교정 중의 이야기를 글로 매 번 남기려다가 중간에 여타의 이유로 잠시 중단을 했고, 이전에 발행했던 글까지 서랍에 다 넣어두었다. 무언가를 계속하다 보면 문득 이걸 왜 지속하고 있는지 원래의 목적을 잊고 무감각해질 때가 있다. 두 달 전 영원할 것 같았던 치아교정을 종료한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벌써?'라는 느낌과 함께, 그간 무의식에 쌓여있던 온갖 감정과 기억이 억눌렸던 문을 부수고 터져 나오듯 의식의 표면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니고, 별로 불편하게 느껴지지도 않아 새삼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던 일상들이 글과 설치물과 그림이 되어 나의 매일의 작업 과정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조만간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글들을 다시 꺼내고 새로이 정리해서 하려다 말았던 이야기들을 내 입안에 남은 생생한 감각이 무뎌지기 전에 나의 방식대로 엮어보고자 한다. 끝날 때가 되어서야, 내가 말하고 표현할 것이 생각이 났다.
올해도 <움직이는 드로잉>이라는 새로운 드로잉 프로젝트로 지역 문화재단의 시각예술창작지원에 선정되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치아교정의 경험들을 드로잉 프로젝트로 엮어낼 것 같다. 원래 하려던 것과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도 나름 흥미롭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디지털 아트북 형식의 브런치북으로 엮을 예정이다.
치아교정은 인생의 특별한 경험이다. 1년 9개월에 걸친 내 몸의 변화와 내 몸에 대한 타자의 개입은 새로운 감각의 자극이 필요한 예술가로서는 영감의 보물과 같은 것이었다. 내 신체에 대해서 몰랐던 부분에 대한 앎과 배움, 그리고 이것이 나의 감각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증폭시키고 나의 삶을 또 한 번 다채롭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브런치북에 하나씩 올리겠지만, 나의 치아교정의 경험에 여러 면에서 매우 만족한다. 치료가 잘 되고 못되고는 내가 판단할 얘기도 아니고,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다. 그보다 이게 내 인생에 얼마나 특별한 경험이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단순히 치아배열이 변형되었다는 의학적인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게 된 배경과, 치료과정 중의 여러 생각과 이를 받아들이는 나의 감각의 예민함, 타인과의 마주침으로 인한 나의 반응, 이것들이 흥미로운 작품으로 결과되는 과정 등이 나만의 이야기, 내 인생의 하나의 색채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을 나열하는 것은 내 작품을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며칠 후에 탈착식 유지장치를 받으러 간다. 오늘 치아 본뜬 모형을 들고 그간의 치료 결과에 대한 마지막 설명을 하길래 그걸 내게 기념품으로 줄 수 없겠냐고 물었는데, 머뭇거리다가 다음에 올 때 플라스틱으로 모형을 만들어 선물로 주겠다고 한다. 매번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치료에 부담을 줄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을 주었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 민망할 것 같기도 하고, 별스러운 건가 생각하면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바쁜데 뭘 주기도 그렇고, 그냥 치료비를 더 얹어주듯 현금을 드릴까도 했다가 (정말 퍼줘도 안 아깝단 생각이 든다. 나 같으면 이 엉망진창인 치아를 절대로 현재 상태로 그 짧은 기간에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의사들도 못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여태 미루고 못한 것도 있다) 의료법인가 김영란법인가에 저촉이 된다고도 하고, 매번 이렇게 망설이면서 마지막에 커피쿠폰에 카드라도 전달할까 했는데 혹여나 커피를 안 마실 것도 같고, 이미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진 부자일 것 같은데 웬만한 건 갖다 버릴 것도 같고, 나만큼 나라는 환자가 그 수많은 환자들 중에 별 기억이 나지도 않을 것 같고, 여러 생각이 들어 결국은 오늘도 망설이다가 그냥 집으로 왔다. 그래도 내 인생에 특별한 경험을 끝까지 잘 마친 감사의 표현은 하고 싶다. 나는 정말 고맙고, 할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한 과정에 절이라도 하고 싶으니 말이다. 치아가 정말 치약포장지에 나온 치아처럼 반듯하게 잘 정돈되었다. 가볍고도 진심이 담긴 뭔가가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고민하는 날이다. 나는 초콜릿, 사탕, 과자, 커피, 케이크 이런 거 다 좋아하는데, 다 이에 안 좋은 것들이라 썩 좋아할 것 같지도 않고, 내가 좋아하는 건 보통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분홍색 리본을 문 앞에 달아놓고 올 수도 없고, 그래도 마지막 하루의 기회가 더 있다고 생각하고, 뭔가 진심을 담은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다. 그게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