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의 심장

by 이영선

소녀는 괴물들이 잠시 저녁을 먹으러 간 사이에 도화지와, 연필과, 작은 전등을 손에 들고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뛰어갔다. 괴물들은 소녀의 발소리를 알아채고 금세 소녀의 뒤를 쫓아갔다. 소녀는 괴물들을 피해 쉬지 않고 달렸다. 너무나 지쳐 쓰러질 때쯤 눈앞에 어두운 늪이 보였다. 소녀는 늪의 어둠을 향해 힘껏 뛰어들었고, 늪은 소녀를 다치지 않게 잘 받아서 그 안에 숨겼다. 소녀를 끈질기게 쫓아오던 세상의 괴물들은 늪의 어둠이 있는 곳에서 멈추었다. 늪은 곧이어 괴물들을 깊은 수렁 속으로 빨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괴물들은 늪의 공포를 느끼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들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서 멀리 사라져 갔다.


소녀는 아주 오래간만에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되는 길고 포근한 잠에 빠져 들었다. 어둠은 부드러운 담요처럼 그녀를 감싸 안았다. 한동안 시간이 흘러 소녀가 눈을 떴을 때에도 보이는 건 검은 어둠뿐이었지만, 고요한 그곳이 평온한 안식처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녀는 손가락을 어둠에 대고 테이블을 하나 그렸다. 그리고 의자와 전등, 옷장을 하나씩 추가했다. 그곳은 그녀의 방이 되었다. 그것들은 곧 사라져 버렸고 애초에 있지도 않았지만, 소녀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계속 그림을 그려 나갔다.


문득 그가 사랑했던 것들이 생각났다. 소녀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모습을 그렸다. 소녀가 커버린 이후의 아버지는 벌써 오래전에 영혼이 식어버리고 몸만 살아서 움직이는 따뜻한 화석과 같았다. 그 옆에는 무뚝뚝하게 서있는 어머니를 그렸다.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소녀는 아주 어렸을 적 악몽을 꾸었을 때 이후로, 한 번도 어머니의 품에 안긴 기억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소녀와 소녀의 아버지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늘 돌처럼 차가운 모습으로 자신의 품에서 아이를 밀쳐내었다. 아이는 오래전부터 마음속 그림이 되어버린 부모와 함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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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고 쓰고 그리고 만드는 통합창작예술가. 장르와 경계를 녹여내어 없던 세상을 만들고 확장하는 자. 그 세상의 이름은 이영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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