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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래몽상가 Nov 18. 2022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다 (김혜남, 2021)

 정신분석 전문의이면서 파킨슨 병과 힘겨운 씨름을 하고 있는 김혜남 선생님의 글은 언제나 잔잔한 울림이 있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 묻는다>, <심리학이 서른 살에 답하다>, <당신과 나 사이> 등 독자들로부터 따뜻한 공감을 많이 받았던 것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저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이어갔다. 하지만, 체력적인 한계로 이번 책을 마지막으로 이제 집필 활동은 그만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레는 마음과 아쉬운 기분이 복잡한 교집합을 이루며 책을 읽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책을 읽을 때 무언가에 쫓기듯 읽어왔던 것 같다. 한 주에 적어도 두 권은 읽어야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는 쓸데없는 압박감이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마음가짐으로 읽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의 새로운 독서 습관으로 자리매김하기로 했다.


 이 책에는 총 34편의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정신분석 전문의의 관점에서 소개되고 있다. 그래서 하루에 한 편의 영화를 본다는 생각으로 욕심내지 않고 읽어보려 했다. 영화 한 편의 이야기는 보통 2시간 정도의 분량이다. 반면, 이 책에서 상영되는 영화 한 편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10분이면 충분히 눈으로 읽을 수 있다. 정신분석학자의 관점에서 해석한 10분의 영화평론을 듣고 예전에 봤던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려보거나 다시 찾아보니 어느덧 10분이 2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왜 책의 제목을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다>로 했고, 부제를 <영화가 묻고 심리학이 답하다>로 했는지를....


 영화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책의 목차가 말해주듯이, 우리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각자 내면의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며, 죽음 앞에서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현실을 살면서 환상을 꿈꾸기도 한다. 이렇게 다채로운 우리의 삶을 다룬 영화의 사회적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았던 것에 의미가 있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제작한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주인공들이 낚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의미에 대한 저자의 비유적 해석을 듣고 어렴풋 기억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다시 보니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낚시는 낚싯바늘 끝에 달린 미끼를 두고 물고기와 벌이는 일종의 전쟁이다. 낚싯줄 끝의 고리에 걸린 물고기는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줄은 더욱 팽팽해지고 갈고리는 물고기의 몸 안에 더욱 깊숙이 박히게 되며 결국 고기는 점점 지쳐간다. 도리어 낚싯바늘에서 풀려나는 방법은 낚시꾼 쪽으로 헤엄쳐 가서 낚싯줄을 느슨하게 한 다음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다."

 나를 속박하는 무언가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얻고 싶어 하지만,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지만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던 경험들을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그럴 때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오히려 낚시꾼 쪽으로 더 다가가다 보면 꼬였던 실타래가 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 가야 꿩을 잡고, 바다에 가야 고기를 잡고,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속담처럼, 때로는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정면 승부를 해야 한다는 교훈이 떠올랐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일까? 이 책의 3장에 소개되는 영화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특히, 로저 도널드슨(Roger Donaldson, 1945~)의 2005년 작품인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 The World’s Fastest Indian>에 등장하는 ‘버트 먼로(Burt Munro)’ 의 이야기는 꿈을 향한 도전에 지친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어쩌면 지금 나에게 필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주인공인 먼로의 이야기는 개략 다음과 같다.


 먼로는 속도광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자신이 구매한 1920년 산 구형 인디언 오토바이로 200마일 이상의 속력을 내서 달리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다. 이를 위해 먼로는 부품을 사고 엔진을 개조하는 등 하루 약 16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날 먼로가 협심증으로 쓰러지자 그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꿈을 이루기 위해 더욱 매진하게 된다. 수많은 좌절과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69세의 나이에 자신의 꿈을 이룬다. 지금도 그가 낸 5분간의 속력(약 324km/h)은 깨지지 않는 기록이라고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개인적으로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꿈을 향한 열정의 엔진이 식어버린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자극을 주었기 때문에 더 큰 울림으로 오래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다.   


 유시민 작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인생을 ‘소망했던 것들을 하나씩 지워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공감이 가는 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느낌도 든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이 들어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너무도 당연하게 포기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버트 먼로처럼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나이는 누구도 정해주지 않는다. 물론 나이가 들면 새로운 시도보다는 안정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먼로가 “때론 지금까지 살아온 평생보다 꿈을 이루는 5분이 더 소중할 때도 있단다.”라고 옆집 꼬마에게 조용히 말하는 장면을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먼로는 5분 동안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을 타고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이 세상에 불가능한 꿈은 없으며, 꿈을 이루는 나이도 한계가 없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준 것이다.       


  책을 통해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책을 읽다 보면 마치 한 편의 완성된 작품을 끝낸 영화감독 또는 시나리오 작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같은 영화를 봐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또는 그동안 보려고 하지 않았거나 보지 못했던 것들에도 나름의 의미가 다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번 독서 여정은 나에게 너무 소중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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