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최전선

by 미래몽상가

#. 나는 어디에 서서 쓰고 있는가?

24년이라는 긴 세월을 군이라는 조직에서 글을 썼다. 지금은 기업의 전략기획실에서 쓰고 있다. 브런치라는 또 다른 공간에서도 쓰고 있다. 직장이 바뀌고, 읽는 책이 달라져도 나의 쓰기는 계속되고 있다.


쓰기는 우리의 일상이다. 짧은 카톡 메시지, SNS에 남기는 일상의 기록들, 이메일, 보고서. 우리는 매일 어떤 형태로든 쓰고 또 쓴다. 방식과 목적은 달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하나다. 우리는 지금도 계속 쓰고 있다는 것.


군에서의 보고서에는 숫자보다 개념과 방향, 논리가 중요했다. 기업의 보고서는 숫자가 많다. 정확해야 하고, 문장은 건조해야 한다. 결론은 명확해야 한다. 화두만 던지는 보고서는 매력이 없다. 확실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So What?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질문이 남으면 안 된다. 그래서 군이나 기업의 보고서에는 감정이 없다.


군이나 기업에서 쓰는 보고서는 재미가 없다. 좋아서 쓰는 것이 아니라 쓰라고 하니까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규칙이나 패턴을 찾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들을 찾게 된다. 주체, 시간과 장소, 숫자만 바꾸면 보고서가 완성될 수 있게 양식을 먼저 만든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지겨워진다. 이런 일은 AI가 싫증 내지 않고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브런치에서의 쓰기는 다르다. 사람에 관한 살아 있는 감정, 사회 문제를 향한 주관적 비판, 내 내면의 소리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들이 담긴다. 다양한 책을 읽으니 당연히 쓰는 내용도 달라진다. 책을 읽고 쓰는 일은 그래서 언제나 새롭다. 매일 다른 메뉴의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는 기분이다. 따라야 할 규칙도, 정해진 패턴도, 양식도 없다. 그래서 난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게 너무 좋다. 자유를 느낄 수 있어서.


왜 쓰는지 물어본다면 ‘그냥 좋아서’라고 답했다. 그러나 ⌜글쓰기의 최전선⌟을 읽고 난 뒤, 그렇게 말하기 어려워졌다.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어느 위치에서 쓰고 있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나는 진정 쓰는 사람인가 아니면 쓰는 행위를 흉내 내는 사람인가? 잘 쓰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사람인가? 이 책을 읽으면 피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 – 울림이 있어야 남는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흐릿해진다. 표현하지 않는 감정은 허공을 떠돈다.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 기록되지 않으면 침묵이 된다.


조직은 침묵을 효율이라고 부른다. 때로는 조용함을 안정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는 침묵 속에서 조금씩 진실을 왜곡시킨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본질은 흐려진다. 말하지 않은 아픔은 개인의 상처로 남지만, 글로 쓰여진 사회적 경험은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글쓰기는 이런 왜곡된 침묵을 기록하고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지독할 정도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뚜벅뚜벅 진실을 찾아가야 한다.


“지식은 넘쳐나는 데 지혜가 빈곤한 글은 무료하다. 울림이 없는 글은 누군가에게 닿지 못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군에서 육군의 미래를 연구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고, 우리가 희망하는 모습을 설계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공허함이 밀려왔다. 이런다고 과연 육군이 달라질까. 상상과 희망을 디자인하는 심정으로 만든 육군의 비전이 과연 구성원의 가슴을 뛰게 할 수 있을까.


그 공허함은 꽤 오래갔다. 거의 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처음 고백해 본다. 그럼에도 계속 썼다. 총이 없는데도 전쟁터에 나가는 심정으로. 날개가 다 돋지 않았는데도 날아야 한다는 다짐으로.


돌이켜보면 그 글들은 단번에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닌 같이 썼기 때문에, 구성원의 목소리를 듣고, 토론하고, 질문하며 함께 기록했기 때문이다. 기록과 질문, 읽기와 쓰기, 소유와 공유, 비판과 상상이 모여 방향을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단순한 기록의 공유가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는 행위이다.


이 책을 읽고 깨달았다.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것을. 울림이 있어야 오래 남는다는 것을. 지식은 넘쳐날 수 있다. 그러나 울림이 없다면 글은 그저 스쳐 지나간 바람에 불과하다. 서툴러도, 투박해도, 거칠어도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글은 사라지지 않는다.



#. 위로가 아닌 긴장

나는 요즘 많이 읽고 많이 쓰려고 한다. 은유 작가님은 화려한 수사보다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문장을 택한다. 솔직함이 오래간다. 때로는 거칠고, 불편하고, 투박해도 솔직한 문장은 살아 있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얼마나 솔직했는가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책은 나에게 위로가 아니라 긴장이었다.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부족해 보여도 지금 나의 모습이다.”


이 문장은 나를 오랫동안 붙잡았다. 내가 쓴 문장은 결국 지금의 나다. 두려움도, 체면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글쓰기는 곧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나의 문장과 서사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더 이상 온전한 내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공감하고, 누군가는 비판하고, 누군가는 침묵할 것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글은 없다. 그러니 내 글이 공유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비록 이 책은 독서 모임에서 정해준 책이지만, 나에게 필요한 책이었다. 나의 글이 공유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 ‘왜’ 쓰는가? - 존재의 풍요를 위해

그동안 내가 왜 브런치에 글을 쓰려고 하는지 진지하게 묻지 않았다. 글을 쓰고 싶어서 시작했고, 공유할 공간이 있으니 썼다. 그러나 정작‘왜’라는 질문은 비어 있었다.

아래 문장을 읽고 오래 책을 덮고 있었다.

“작가는 명사의 꼴을 한 동사다. 작가는 행하는 자, 느끼는 자, 쓰는 자다. 세상과 많이 부딪치고 아파하고 교감할수록 자기가 거느리는 정서와 감각과 지혜가 많아지는 법이니, 그렇게 글쓰기는 존재의 풍요에 기여한다.”

나는 쓰는 사람인가, 아니면 작가라는 명사를 욕망하는 사람인가.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서 나는 “쓰지 않으면 사라진다”라고 했다. 그리고 “울림이 없는 글은 닿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은 ‘증명’이 아니라 ‘확장’이었다. 군에서 비전을 쓸 때도 혼자 쓰지 않았다. 수많은 토론과 질문과 수정이 있었다. 그 과정을 거치며 문장들이 다듬어졌고, 방향은 단단해졌다. 글은 혼자 쓸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성되지 않는다. 읽히는 순간, 타인의 사유와 만나고, 다른 경험과 섞이고, 새로운 의미로 확장된다. 읽기는 소유일지 몰라도, 쓰기는 결국 공유다. 공유할수록 우리는 풍요로워진다.


내가 읽고 고민한 사유를 밖으로 꺼내어 누군가와 나눌 때, 그 사유는 또 다른 사유를 촉발한다. 누군가는 공감하고, 누군가는 반박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 과정에서 세상이 조금 더 다층적으로 보이고, 나의 시야는 조금 더 넓어진다.


내가 쓰는 한 편의 글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생각을 조금 흔들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작은 흔들림이 대화의 소재가 되고, 또 다른 질문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쓰고 싶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사유하기 위해. 존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의 풍요를 나누기 위해.


은유 작가는 말한다.

“가슴에 물음표가 많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이 많다. 작은 자극에도 촉발을 받고 영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물음표가 어느 순간 느낌표로 변하고 다른 삶의 국면을 통과하면 그 느낌표는 또다시 물음표가 된다. 그 물음표가 느낌표의 반복과 순환이 자기만의 사유를 낳는다.”

존재의 풍요란 거창한 성취가 아니다. 물음표와 느낌표가 오가는 사유의 반복이다. 질문이 생기고, 깨달음이 쌓이고,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는 그 순환 속에서 사유가 깊어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순환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그 사유의 흐름을 혼자만 간직하지 않고 밖으로 꺼내 확장시키는 일이다. 내 글이 누군가의 물음표에 마침표가 되어주고, 또 하나의 물음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어떻게’ 쓸 것인가?

존재의 풍요를 나누고, 사유의 확장을 위해 쓰겠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다짐이 문장 속에서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를 묻는 순간, 나는 다시 망설이게 된다.

은유 작가는 말한다.

“쓰기는 나를 지키는 무엇이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건네는 가장 낮은 수준의 손길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단어는 ‘감응’이다. 감정의 과시가 아니라, 타인의 삶에 조용히 접속하는 태도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써야 할까.


나는 앞으로 내가 확신하는 것보다 내가 흔들리는 지점을 쓰겠다. 나를 멈춰 세운 문장, 쉽게 설명되지 않는 감정,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붙들겠다. 완성된 답을 먼저 세워두지 않겠다. 대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책을 읽고, 내 생각과 다른 주장 앞에 머물겠다. 물음표를 두려워하지 않겠다.


그리고 타인의 이야기를 빌려 내 생각을 증명하지 않겠다. 그동안 나는 작가가 차려준 음식을 맛보고 평가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이제는 나의 서사도 꺼내 보겠다. 서툴더라도,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 내면의 최전선

최전선은 바깥의 전장이 아니라 결국 내 안의 회피, 두려움, 망설임과 마주하는 곳이다. 안전한 자리에서, 중립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솔직함보다 체면을 생각해 글을 써오지 않았는지 반성해 본다. 내 안에 있는 최전선을 돌파하지 않고서는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을 것 같다.


이제는 ‘왜 쓰는가’ 물으면 조금 다르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침묵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작은 울림을 통해 이 세상 모든 존재의 풍요를 위해 쓴다고.

비록 다듬어지지 않았고, 화려한 수사가 없는 문장이더라도 일단은 그냥 쓰려고 한다. 쓰다 보면 언젠가 무언가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의 위치를 외면하지 않고, 조금 더 솔직하게 쓰려고 한다. 작은 울림 하나라도 남기기 위해. 그리고 그 울림이 존재의 풍요와 또 다른 사유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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