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대명절이라는 추석. 단군이래 최장 연휴일 것 같은 올해 추석도 여느 때처럼 시댁에 방문했다. 평상시에 잘 찾아뵙지 않기 때문에 명절에라도 꼭 시댁에는 가려고 한다. 아이들에게도 양가 조부모님은 명절에 꼭 찾아뵙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싶다.
시부모님은 왜인지 옛날분들의 성향을 갖고 계셔서 우리 첫째가 태어났을 때 아들이라고 참 좋아하셨다. 딸을 바랐던 나는 시부모님의 기뻐하는 마음도 마냥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귀한 아들이라고 여기며 미묘한 기대감을 내비치는 것도 괜히 언짢았다.
그런데 그 첫째 손주가 시어머니의 성향과는 또 전혀 맞지 않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성향의 아이라서 시어머니의 마음에는 서운함이 한 점 담겨있는 듯하다. 코로나가 역병으로 간주되던 시절, 둘째가 코로나에 걸려 나는 같이 격리되고 홀로 시댁에 보내진 첫째는 할머니와 틈만 나면 다퉜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나는 은근히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그렇다, 인정한다. 이상한 성격이다.)
추석당일, 제사를 지내고 교통체증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댁 어른들이 마치 내 사전에 양보는 없다는 듯이 동생과 투닥거리고 있는 첫째 대단이에게 훈수를 두셨다.
"엄마, 아빠가 이 세상에 없으면 대단이가 동생을 돌봐줘야 해. 동생을 오빠인 네가 잘 돌봐줘야지, 괴롭히면 되겠니?"
맙소사,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난 단 한 번도 아이에게 네가 오빠기 때문에 동생을 돌봐줘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오빠로 태어난 것은 아이가 선택한 사항이 아닌데 괜한 의무감을 더해 억울함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것은 첫째로 나고 자란 나의 경험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엄마, 아빠가 어느 날 없어질 수도 있다는 가정도 나에게는 의아하기만 했다.
대단이와 뽀뽀의 성격적 특징을 이 세상에서 나만큼 파악하고 있을 사람은 없으리라고 자신한다. 단지 엄마여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관찰하고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는 데 가장 시간을 쏟는 사람이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단이의 성정을 고려해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주입시키고 있다. 물론 나의 분노조절 장애라는 막강한 상대와도 매일 힘겨루기를 하고 있지만. 어쨌든 나도 딴에는 나름 노력하는 엄마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집의 이런 사정을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남편의 이모님이 아실리는 만무하다.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계신 나를 제외한 두 분의 엄마(시어머니와 남편의 이모)들은 치고받고 싸워대는 두 살 터울의 아이들을 키워 본 경험이 없었다. 시어머니조차도 아이의 인성을 운운하며 이모님의 말씀을 거들었다. 아마도 그간의 손자에 대한 본인의 서운함을 녹이신 모양새다.
덧붙여 남편의 이모님은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얘 학교에서 1등만 하니?"
초등학교 1학년한테 웬 1등? 나는 순간 아득해졌다. 이 맥락 없는 대화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두 분의 대화에 반감은 즉각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다 대고 그저 "아직 애기라서 그래요."라는 바보 같은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오... 진짜 이불킥 감이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버럭 화를 내지 않은 것이 애써 찾은 칭찬포인트랄까.
쉽게 타인을 넘겨짚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는 상대방이 나에게 같은 우를 저질렀을 때 속수무책이다. 예측하지 못한 돌발상황에 나는 내 아이와 나 자신을 제대로 변호하지 못했다. 이 상황에 대한 잔상은 꽤 찝찝하게 그날 나의 기분을 지배했다.
그 대화의 앞뒤 상황을 돌이켜 보니 시골에 계신 분들의 눈에는 서울에 살며 나름 공부를 했던 가닥이 있는 내가 1등만 부르짖으며 아이를 몰아붙이고 아이의 인성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극성엄마로 비치나 보다. '아니, 학습지 하나 시켜본 적이 없는 나에게 도대체 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가 아기일 때 자연스럽게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을 보여주시는 시어머니에게 가차 없이 눈치를 줬던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간 내가 시전 했던 전혀 고분고분하지 않은 며느리의 이미지도 혁혁한 역할을 했으리라.
부모는 아이를 양육하는 존재다. 때문에 아이는 부모의 지대한 영향 아래 자란다. 아이의 문제행동이 발견되면 부모의 양육태도 혹은 양육관을 비난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접근방법이다. 인풋이 부모의 양육이라면 아웃풋은 아이 그 자체이므로 모든 문제는 부모에게 있다는 단순한 결론이다. 남편의 이모님은 우리 부부의(아니 나의) 1등만 강조하는 양육태도 때문에 아이가 훌륭한 인성을 탑재하지 못한 채 사회부적응자로 자라게 될까 우려하신 것이다.
어른들의 말씀 따위야 남편 말대로 "내비두자고 해도" 나는 바보천치 같은 나의 리액션이 도저히 참아지지가 않았다. 집에 와서 노트를 펴고 아이에 대한 내 생각을 옮겨 적었다.
저의 아들 대단이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멋진 아이입니다.
다방면에 호기심이 많아 세상을 열심히 배워가고 있습니다.
때로 친구나 동생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해 보이기도 하지만 본래는 착하고 정이 많은 아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