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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고 비루해도, 나는 이 세계가 좋아

나의 전성기는 바로 지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by 영백

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려서 집에서 영화를 보던 시절에 명절 오후의 TV는 어김없이 홍콩 액션 영화를 내보냈다. 가장 친숙한 배우는 역시 성룡! '폴리스 스토리', '취권' 같은 성룡의 영화는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 오후에 병풍 같은 프로그램으로 손색이 없었다. 성룡의 취권과 무술을 보고 자란 세대는 예스마담의 존재도 알 것이다. 1980년대에도 화려한 액션이 가능한 여배우가 존재했는데, 그게 바로 양자경이었다. 브라운관 TV앞에 옹기종기 모인 꼬마들이 짧은 커트머리를 한 여형사가 맨손으로 악당들을 무찌르는 장면을 참 열심히도 봤다. 언제 끝나나 싶게 길었던 그 액션퀀스가 아직도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종횡무진 스크린을 누비는 양자경의 발차기가 강력하긴 했나 보다.


사실 나에게 양자경이라는 배우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영화는 <와호장룡>이 마지막이다. 양자경이 미셸 여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양자경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은 잊혀져 갔다. 세트장을 날아다니며 무술실력을 선보이던 그녀가 주인공의 돈 많은 어머니로 등장한 포스터를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세월이 참 야속하다 싶게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다. 예스마담의 발차기를 침 흘리며 보던 초딩 양자경 뺨치게 놀이터를 날아다니는 말괄량이 여자아이의 엄마가 었듯이.


그런 그녀가 다시 영화 포스터 한가운데 다시 등장했다. 그것도 이게 대체 무슨 황당무계한 이야기야? 싶은 영화에. 바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미국에서 억척스럽게 빨래방을 운영하는 중국인 부부 에블린과 웨이먼드는 세무조사라는 일생일대의 위기에 봉착한다. 세탁소 운영과 잡다한 집안 대소사로 정신없는 에블린은 아이 둘과 함께 있다 혼이 쏙 빠진 내 모습과 상당히 겹쳐 보였다. 강퍅한 중년 여성인 에블린의 인생이 얼마나 고되고 외로웠을지가 '안 봐도 비디오' 느낌으로 고스란히 그려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의 땅에서 적성에 맞지 않는 빨래방과 씨름하며 살아온 그녀 삶을 그저 버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에블린이 얼마나 가족들을 괴롭히고 외롭게 했을지 또한 안 봐도 비디오.


그런 그녀가 세무조사 중, 다른 세계에서 온 남편 웨이먼드와 만난다. 그는 다른 세계의 자신과 접속해 능력을 흡수하는 법을 알려주고 에블린은 세계를 옮겨가며 다른 모습의 자신을 경험한다. 에블린은 세계를 초월한 빌런 조부 투바키와의 싸움을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이 영화의 중반부까지 내용인데... 이 다음의 이야기를 옮기는 게 쉽지 않다. 기상천외한 행동을 하면 세계를 넘나드는 점프 버스를 할 수 있어 다른 세계의 자신의 능력을 습득한 에블린은 쿵푸의 고수도 됐다가 경극 가수도 됐다가, 간판 곡예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도 한다.


뭐지, 이 정신없음은? 할머니 옷을 입은 양자경이 코피를 흘리며 세무서에서 쿵푸를 한다. 다른 세계에서 온 웨이몬드는 속사포처럼 멀티버스에 대한 이야기를 떠드는데 그 말들이 이상하게 심금을 울린다. 딸내미 조이는 빌런 조부 투바키가 되어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할리퀸처럼 오싹하게 등장해서는 이내 스타워즈 아미달라 여왕 같은 얼굴로 허무한 대사를 읊는다. 우리는 베이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런데 소시지 손가락은 도대체 왜 나오는 거지?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베이글의 한가운데 그 동그란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러 세계를 돌고 돌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빨려 들어가기 직전 묵직한 한 방을 날린다. 네가 숨 쉬는 곳은 바로 이곳, 여기라는 것.


모든 세계를 경험했기 때문에 허무주의에 빠져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는 조부 투바키. 무엇이든 못하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탁소 에블린은 홀로 수많은 싸움을 치른다. 그 모든 세계에서 그녀는 한결같은 선택을 하는데 그것은 딸 조이를 구하는 것이다.


조부 투바키는 모든 것을 경험하기라도 했지,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주제에 지레 겁을 먹고 허무주의에 빠졌던 나의 20대가 떠올랐다. '다 의미 없어, 다 부질없어.'라며 의미 있어 보이는 어떤 것에도 발을 들이지 못했던 날들.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낸 것만 같았던 시간들도 차곡차곡 쌓여 나라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은 의미야 찾으려면 차고 넘치는 엄마의 나날들을 정신없이 보내고 있지만, 때론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막막함에 사로잡힌다. 학교 가기 싫다고 울며 버팅기는 놀이터 양자경을 학교에 밀어 넣고 회사까지 걸어서 30분 거리를 14분 안에 내달리며 '이렇게 정신없이 사는 것의 의미는 무엇 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아침에 부랴부랴 남기고 간 설거지, 어제 건조기에서 탈출한 빨래들, 하루에 한 번은 청소기를 돌려야하는 마룻바닥이 나를 숨막히게 한다. 에블린의 영수증처럼 정산해야 할 하루의 숙제들이 산더미처럼 느껴질 테면 나의 하루가 참 하찮고 비루하게 느껴진다.


그 순간, 웨이먼드의 대사가 떠올랐다. "다른 생에선 당신과 함께 빨래방도 하고 세금도 내고 살고 싶어." 지금의 나의 삶이 다른 세계의 내가 염원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달음박질하는 내 발에 힘이 실렸다. 힘내라고 슬쩍 내 등을 밀어주듯이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양자경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누구도 여러분의 전성기가 지났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라.'라는 소감을 남겼다. 조부 투바키의 허무한 시간을 너머 치열하게 고군분투하는 세탁소 에블린 같은 지금이 나의 전성기일 수도 있겠다.

상식이 통하는 것도 한 줌의 시간일 뿐인 세계지만 그 시간을 소중히 하며 이 세계를 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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