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미안해.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by 영백

잊을만하면 한 번씩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그 친구. 번아웃이 나를 덮쳤다. 워낙 동분서주 몰아치듯 살아내는 일상이라 번아웃이 온다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다르다.


지금까지는 내가 너무 지쳤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하던 일을 잠시 멈추는 것으로 해결이 됐다. 글을 쓴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 소진된 나를 다시 채우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재충전 프로젝트의 마무리는 언제나 두 아이들을 보면서 으쌰으쌰 마음을 다 잡는 것이었다. 시간은 흘러가니까, 아이들은 커 가니까 오늘을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내 어깨에 지워져 있는 많은 일들이 눈 녹듯 사라져 있을 거야.


아이콘으로 가득한 바탕화면 같은 머릿속, 그 안의 부정적인 생각을 필요 없는 아이콘을 하나하나 지우듯 없애 나가며 안정을 되찾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불안을 떨쳐내려 해도 물귀신처럼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의 번아웃은 두 아이들 때문이다. 아이들의 치다꺼리를 하다가 아교처럼 달라붙어 싸우는 아이들을 떨어뜨려 놓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다 보면 결국에는 폭발한다. 심리적 탈진은 몸을 아프게 한다. 힘이 쭉 빠지고 온몸이 쑤신다. 신경이 곤두서서 작은 일에도 바락바락 악을 쓰게 된다.


달콤해야 할 퇴근길, 집에 가는 것이 두려워졌다. '오늘은 화를 내지 말아야지.'하고 다짐해 보지만 어느 타이밍에 내가 무너질지 나조차 예상할 수 없다. 집에 돌아와 대단이의 알림장을 확인하려고 책가방을 여니 활짝 열려 있는 필통과 필통 안의 물건들이 죄다 쏟아져 책가방 안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아침에도 다 쏟아져 있는 연필이며 지우개를 필통 안에 넣어 지퍼를 채워 줬다. 도대체 왜 매일 이렇게 필통을 열고 다니는 걸까?


대단이의 밥상머리에서 잔소리를 했다. "대단아, 필통 좀 제발 닫고 다닐 수 없니?" 대단이는 의아한 듯 한 번 쳐다 보고는 대답했다. "알았어.."


그리고 알림장을 폈다. 오늘도 대단이의 글씨는 노트 위를 날아다닌다. 글씨는 잘 써야 한다고 타이르기도 하고, 알림장을 고대로 다시 쓰게 하겠다고 으름장도 놓아 보았지만 늘 제자리다. 더듬더듬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려고 애써보다 참담해졌다. 대단이 보고 읽어 보라고 했다. 자기도 무슨 글씨인지 모르겠단다. 1학년부터 3학년이 된 지금까지 매일 반복되는 일이다. 대단이의 알림장이 엄마로서 너는 무능하다고 질책하는 것 같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또 한 번 꾹 참아냈다. 그 표정이 당연히 좋을 리가 없다. 예전에는 잔뜩 찌푸린 내 이맛살을 대단이가 검지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펴 주고는 했다. 그럴 때면 참 머쓱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었구나. 나는 기본값이 고단한 사람인 건가. 이제 대단이는 내 이맛살을 어루만져주는 대신 열심히 내 눈치를 본다. 가슴이 답답해져 와 나도 모르게 한숨이 절로 쉬어진다.


대단이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입력이 잘 안 되는 편이다. 다리를 꼬고 앉지 말라고 수백 번 이야기하지만 항상 다리를 꼬고 앉는다. 물건을 자기 쪽으로 가지고 오지 않고 물건 있는 곳에 제 몸을 꾸겨 맞춘다. 벌써 대단이의 척추는 눈으로 확연히 보일 정도로 휘어져 있다. '저걸 빨리 교정시켜 줘야 하는데..'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단이에게 구르기 50번을 시킨다. 그것 또한 매일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대단이의 필통, 대단이의 글씨, 대단이의 척추. 하나하나 다 고쳐 나가야 할 것투성이다. 대단이는 나에게 일 덩어리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오늘 할 일을 해 주면 되었다. 때가 되면 끼니를 챙겨 주고 저녁을 먹고 나서는 씻기고, 자기 전에 그림책을 읽어 주었다.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나면, 뿌듯했다. 나 자신이 대견했다. 오늘도 나는 아이들의 하루를 충실히 채워 주었다고. 나는 오늘도 하나 이루었다고.


그런데 아이들이 커갈수록 해야 하는 일들은 늘어만 가는데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여전히 끼니를 챙겨 주고 씻기고 책도 읽어 준다. 영어학원 숙제도 봐주고 수학 문제집도 풀게 해야 한다. 읽었으면 하는 책들은 책가방에 넣어준다. 준비물은 빠뜨리는 것이 없는지 학교 행사를 놓치고 있지 않은지 늘 체크해야 한다. 와중에 아이들의 잘못된 습관이 눈에 들어오면 다 내 잘못인 것만 같다. 내가 잘못 가르쳐서 생긴 일 같다.


"엄마,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

"그러게.. 한숨이 자꾸 쉬어지네. 한숨 쉬면 안 되는데... 자꾸 쉬어져."


예전 같으면 아이의 말을 듣고 억지로라도 한숨을 쉬지 않으려고 했을 텐데. 그럴 기운이 없다. 이럴 때면 아이들 보기가 면구스러워 아이들과 눈도 안 마주친다. 한껏 지친 표정으로 나는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다. 대단이가 툭 얘기한다.


"엄마... 미안해.."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럴 땐 미안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고맙다고 하는 거야." 잠깐, 그런데 갑자기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거지?



우리 엄마는 틈만 나면 나에게 비난의 눈총을 보내곤 했다. 나는 항상 나의 존재가 민망했다. 분명 내 잘못이 아닌데도 왜 나는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걸까? 내 자리는 그럼 어디지?


나의 아이들에게는 다른 것은 몰라도 억울한 마음은 갖지 않게 키우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아이는 엄마에게 사과를 했다. 자기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아이의 일에 내가 짓눌리는 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 아이의 일은 아이의 몫이지 내 것이 아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는 이유가 있었다. 글씨를 못 쓰는 것은 글씨를 잘 써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지 못해서였고, 자세를 고치지 않는 것은 아직 허리가 아프지 않아서였다. 필통이야 쏟아지든 굴러다니든 아이의 관심사가 아니다.


엄마가 모든 것을 아이에게 가르쳐줘야 할 필요는 없다. 아이가 불편함을 스스로 느낀다면 자기가 고쳐나갈 것이다. 그전에 엄마가 아이에게 늘어놓는 말들은 그저 잔소리일 뿐이다. 아이가 글씨를 잘 쓰기 원한다면 내가 글씨를 예쁘게 쓰고, 아이가 바른 자세를 갖기 원한다면, 나부터 꼿꼿이 등을 펴면 된다. 말을 하다 지칠 바에는 입을 다물고, 보고 있어 괴롭다면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자.


오늘은 대단이의 필통이 꼭 잠겨 있었다. 필통을 열어 보니 놀랍게도 자, 연필, 형광펜, 지우개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우아악, 소리를 질렀다. "대단이 아빠!! 대단이 아빠아!!!! 대단이 필통이 정리가 되어 있어!!!" 남편은 내심 놀란 것 같지만 나름 대단이를 생각해서 당연한 일에 왜 호들갑이냐는 태도를 취했다. 대단이는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좋아 헤벌쭉 웃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달라진다고? 저녁식사를 하면서 대단이에게 물어봤다.


"대단아, 근데 필통은 네가 정리한 거야?"


"아니, 친구들이 정리해 줬는데?"


그래, 그러면 그렇지. 한결같아 좋은 대단이.


정리해 준 친구들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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