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해

내 안의 샘물이 바닥을 드러낼 때

by 영백

날씨가 미쳤다. 지방의 어느 도시에서 아스팔트가 녹아내렸다고 하니 말 다했다. 아이를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교습소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상 주차장을 가로지르다 이 더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아스팔트 위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팔에 닿으니 사우나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피부가 화끈화끈 익었다. 양 옆으로 주차되어 있는 차들도 엄청난 열기를 발산했다. 무더위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이 열기에 머릿속 비상등이 적신호를 켰다. 빨리 안전한 집으로 대피해!


그런데 웬걸. 집은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검도학원을 마치고 집에 온 대단이가 갑자기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자기가 아끼는 책에 실려 있는 수수께끼와 미로 찾기를 뽀뽀가 다 풀어버린 것이다. 지우개로 빡빡 문질러 지우려 했지만 문제집이 아닌 이상 컬러로 인쇄된 책장은 지우개로 지우면 허옇게 일어나 흉물스러워지기 마련이다. "당장 새 책을 가져와! 돈 내놔!" 대단이는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하며 상실감과 분노를 온몸으로 표현했다. 사실, 책을 보물처럼 아꼈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에게 대단이가 토로하는 감정들은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토닥토닥... 속상하지? 화나지? 엄마도 알아.. 뽀뽀! 이제는 다시 오빠 책에 낙서하지 마!


그런데 대단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장 새 책을 사 내!! 뽀뽀!! 네가 사 내!" 급기야 뽀뽀가 모아놓은 용돈지갑에까지 손을 대며 책을 사겠다고 했다. 내 눈에는 뽀뽀의 민망함도 보였다. 오빠가 하도 난리를 치니 이 삼복더위에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이 방문을 닫고 피신해 있었다.


36도를 육박하는 날씨. 어질어질할 정도로 열이 오르는 오후 4시에 따릉이를 타고 퇴근했다. 방과 후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이것저것 사부작거리다 검도학원 차량이 오는 시각을 자꾸 놓치는 대단이를 챙기기 위해서다. 주말 내내 외식을 하며 고기를 잔뜩 먹었으니 오늘은 꼭 생선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부랴부랴 쌀을 씻고 고등어를 구웠다. 뽀뽀의 피아노 수업이 끝날 시간이다. 서둘러 뽀뽀를 데리러 갔다. 세상 반갑게 엄마에게 달려온 뽀뽀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집에 왔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지.


뭐라고 달래도 먹히지 않는 대단이의 생난리를 무기력하게 바라본 지 20분쯤,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나기 시작했다. 대단이가 난리 쳤던 것보다 10배, 100배쯤 난리를 쳤다. 지랄발광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아이들에게 몸소 보여줬다.


"니들이 나를 기어코 잡아먹으려고 하지! 어떻게 나를 이렇게 못 살게 해!!!"


대단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그래! 지금 바로 나가서 새 책을 사서 오자!"였을 것이다. 대단이에게 갈급했던 것은 위로나 공감보다는 문제의 책을 뽀뽀의 손이 닿기 전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에 산 책을 다시 사는 것에 대해 이게 맞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고 "엄마가 지금 결정을 내리기 어려우니 아빠가 오면 다시 이야기해보자." 라고 했다. 사실, 게임을 테마로 한 책이라 구입할 때도 마뜩잖았다. 정가 만 오천 원..무려 만 오천원이나 되는 책 값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러나 대단이는 이따가 다시 이야기해보자는 말을 듣고 더욱 분개했다.


내가 내어놓은 제안들이 전혀 먹혀들지 않자, 극강의 무력함이 느껴졌다. 아이들은 난리가 나고 나는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대단이는 자기가 아끼는 책에 낙서한 동생에게 화가 날 수 있다. 뽀뽀도 제 것은 아니지만 오빠의 책에 있는 미로를 슥슥 그 수 있다. 아이들이니까, 아이들이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엄마인 나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지랄발광을 해서는 안된다. 그럼 이 상황에서 제일 문제 있는 사람은 나잖아.


그런 생각이 드니 급기야 슬퍼지기까지 했다. 더위에, 아이들의 생떼에, 매일같이 해야 하는 일들에 지칠대로 지친 나는 대단이처럼 목놓아 울어 버렸다. 아이들이 보거나 말거나, 누가 듣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띠리리 세탁기가 다 돌았다는 멜로디가 들려서. 책도 읽어주고 문제집도 풀라고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서. 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어서. 엄마의 시간이 아닌 나의 시간을 언제쯤 되찾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어서.

이 사달의 문제가 뭘까? 이 미칠 듯이 푹푹 찌는 더위인가. 나의 제지나 으름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뛰는 아이들인가, 아니면 그냥 나인가?


이 이야기를 회사 친구한테 전하다 떠올랐다. 월요일에 있었던 이 에피소드가, 지난주 토요일에도, 금요일에도 비슷한 식으로 반복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일은 없지만 그 전날도 그 전전날에도 사정은 비슷했으리라. 나는 너무 심지가 짧아. 순식간에 불타올라..라고 읊조리다 깨달았다. 아이들은 그동안 참 열심히도 '엄마의 인내'라는 샘물을 퍼 올리고 있었다. 그 샘이 바닥을 드러낸 것이 이 날이었다.


어린애처럼 엉엉 울면서 머리를 스쳐 지나갔던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도 못 찾았다. 누가 답을 알면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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