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이의 슬기로운 방학생활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니까..!

by 영백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우리 집 아이들도 신이 났다. 3학년인 대단이는 7월이 되자 방학식만 기다리는 눈치였고 난생처음 방학을 맞은 1학년 뽀뽀는 뭔지도 모르고 덩달아 들떠 보였다. 반면, 엄마들의 한숨은 깊어진다. 집에서 아이와 함께 보내는 엄마들은 삼시세끼 아이 밥을 차려주며, 아이와 부대낄 시간에 걱정이 하나 가득이고 나처럼 일을 하는 엄마들은 돌봄 공백 없이 아이들의 스케줄을 짜는데 골머리를 썩는다.


우리 집 애들은 방학이어도 매일 학교에 가야 한다. 집에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는 가정을 위해 학교에서 방학기간에도 돌봄 교실을 운영해 주시니 학교를 향해 만세삼창을 외치고 싶을 정도로 감사감사감사하다. 대단이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뽀뽀는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방학기간에도 매일 학교를 가야 한다는 아마도 매우 불편할 진실을.


3년 차 학부모인 나도 짬이 늘어 심적 여유가 생겼다. 긴긴 시간 돌봄 교실에 있는 아이들을 배려해 최대한 학교를 늦게 가야 한다. 작년, 그러니까 대단이가 2학년 때 참 정신없이 바빴다. 하루하루 날아오는 일들을 쳐내며 살다 보니 두 번의 방학을 어떻게 났었는지도 까먹고 있었다. 방학 첫날, 여느 때처럼 다섯 시쯤 대단이를 데리러 갔는데 학교에서 비틀비틀 나오는 아이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방과 후 교실도 방학 첫 주는 쉬어간다. 우리 대단이는 아침 아홉 시부터 다섯 시까지 내내 돌봄 교실에서만 있었던 것이다. 돌봄 교실도 방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긴 하지만 한 공간에서 그렇게 오래 있는 것이 아홉 살 아이에게는 버거웠을 터. 게다가 그때까지 남아있는 아이는 대단이밖에 없었다. 비척비척 힘없이 걸어 나오던 아이의 모습이 나의 미안함과 함께 각인되어 방학 중 학교는 최대한 늦게 보내려고 한다. 돌봄 선생님이 늦어도 열 시까지는 등교하라고 하셨으니 열 시에 딱 맞춰서 보내야지.




나는 아이들의 방학을 치러내야 하는 관문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돌봄 공백 없이 무사히 버텨내야 한다!!! 전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이 전투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은 나. 아이들은 라이언 일병들. 지원군은 친정엄마.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남편은.. 지원군 2.. 정도라고 해두자. 아이들에게 방학은 신나는 이벤트인데 엄마가 이끄는 방학은 뭔가 사뭇 비장하다. 돌봄 교실로 학원으로 왔다 갔다 하다 보면 학교수업만 없을 뿐, 아이들은 출근하는 엄마와 비슷한 시간에 나갔다 비슷한 시간에 돌아와야 한다.


방학식, 책가방을 가득 채워 온 아이의 책가방을 들여다보다 재미있는 그림을 발견했다.

바로 대단이의 여름방학 버킷리스트!

대단이가 좋아하는 것들은 다 들어 있다. 여행 가기, 낚시하기, 게임하기, 유튜브 보기, 친구랑 놀기, 아트박스 가기, 학원 안 가고 싶을 땐 안 가기. 맘껏 하루 종일 놀기. 대단이의 페르소나 졸라맨들로 가득한 그림도 볼수록 시원시원하게 직관적이다. 그런데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모두 얼마든지 다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여행은 대충 계획이 잡혀 있고, 게임하기, 유튜브 하기 이건 매일 하는 건데? 아트박스 가기.. 도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이 드나들고 있고 뷔페는 당연히 갈 수 있잖아!


여름방학에 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낚시는 이 지옥 불더위에는 도저히 안될 것 같고 '학원 안 가고 싶을 땐 안 가기'도 절대 안 된다. 검도, 피아노, 미술 뭐 하나 빠질 순 없지!(가뜩이나 학원 방학도 껴 있는데.. 다 돈이다! 돈!!!)


대단이는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느끼는 아이다. 쉽게 기뻐하고 쉽게 슬퍼하고 쉽게 화내고, 쉽게 즐거워한다. 아직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미숙하지만 누구보다 생생하게 대단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을 느끼고 있다. 이 버킷리스트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대단이만을 위한 것이다. 하나하나 너무나 소소해서 웃음이 나오지만 '여름방학을 신나게 보낼 거야!'라는 대단이의 원대한 포부가 담겨 있다.


작년 이맘때, 행복에 대한 힌트를 얻고 싶어서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을 읽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그의 인터뷰를 보고 꽤 충격을 받았다. 나는 오늘의 기쁨을 적금을 넣듯 아끼고 아껴 어딘가에 저당 잡히고 있었다. 이렇게 참고 아끼며 살다 보면 언젠가 나에게 커다란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건 행복이 아니란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은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너를 위한 일을 하라고 나를 채근했다. 네가 기분 좋아지는 일을 해.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몽실몽실해지는 아로마 오일의 향을 맡아보고, 너를 바닷가로 당장에 데려가 줄 음악을 들어 보고, 쨍하게 하늘이 파란 날에는 잠시 멈춰서 하늘을 봐.


그때의 다짐들을 어느새 잊고 있었다. 마음에 꼭 들어 산 바디로션은 한 통을 다 쓰고는 다시 채우지 않았고, 큰맘 먹고 산 아로마 스톤에는 오일 향 대신 먼지가 소복이 쌓였다. 나에게 여름방학이 있다면 나는 버킷리스트에 무엇을 담을까?


오늘 하루의 행복을 만끽하기 위해 부지런히 쏘다니는 대단이를 생각했다. 친구 영롱이를 만나서 함께 자전거를 타고 아트박스에 가고 싶은 대단이는 오늘치 행복을 위해 채워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계획에는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니 2안, 3안도 마련되어 있다. 날씨가 더워서 나가지 못하면 넷플릭스로 애니메이션을 본다든지. 대단이는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와 꽉 한 번 세게 껴안고 간다. 너무 재밌을 때 나오는 행동이다.


대단이에게 방학 동안 이 버킷리스트에 담긴 일들을 다 해보자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맘껏 하루 종일 놀기' 데이를 정해서 해보자고 제안했다. "당장 다음 주 토요일은 어때?" 대단이가 씩 웃으며 얘기했다.

"그럼 방학 끝나고 할래. 어차피 방학 때는 맨날 맘껏 하루 종일 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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