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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비누 Jul 11. 2017

'아름'답게 아름다운 '그 후'

영화 <그 후>

“뭐하나 물어봐도 돼요? 왜 사세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라도 결코 쉽게 답하지 못할 질문이다. 거꾸로, 이런 질문을 또 누가 그리 쉽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영화 속 아름(김민희)은 문학평론가로 소위 ‘잘 나가는’ 출판사장인 봉완(권해효)에게 처음 만난 날, 아주 쉽게 묻는다.

영화 '그 후'

출판사 직원이었던 창숙(김새벽)과 불륜관계를 정리한 지 한 달도 안된 봉완은 새로 뽑은 직원 아름의 질문에 처음에는 헛웃음을 짓는다. 그러다 “뭐, 사랑? 뭐 그런 거라고 말하면 되나? 말로 말을 지어 내는 거지, 그건 진짜랑 상관없다. 진짜는 이 세상과 따로 가는 거지.” 그리고 “정말 믿는다는 건 진짜 실체와 상관없다.”라고 한다. 아름은 봉완의 대답에 “그럼 진짜 왜 사시는지 모르시는 거네요.”라며 응수하고, “믿는 걸 찾아내서 그걸 믿는 게 힘드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실체라는 허상 때문에 우리가 필요한 믿음을 찾지 않는 것”이라며 봉완을 압박한다. 결국 봉완은 영화 속 가장 뼈대 있는 아름의 믿음 세 가지를  듣고 “너 뭘 좀 아는구나?”라며 좋은 사람이 출판사에 들어왔다고 환영한다.


<그 후>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불륜관계’에 치중한 나머지 가장 깊은 핵심 논점에 대해서는 놓치기 쉽다. 이 영화는 실체와 믿음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체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믿음을 갖고 사는 아름의 대립적인 이야기. 아름을 제외한 세 명의 등장인물은 실체에 눈이 멀어 사는 사람이라고 불 수 있다. 가장 핵심이 되는 에피소드인 봉완의 아내 해주(조윤희)가 남편의 외도 상대를 아름이라고 착각하는 것도, 실제 외도 상대인 창숙이 아름을 봉완의 외도 상대로 해주에게 거짓말하자고 하는 것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아름을 제외한 인물들은 아름을 두고 자기가 편한 대로 상황을 이끌어간다. 여기서, 이 인물들을 조금 더 넓은 의미로 대립해보고 싶다.

영화 '그 후'

아름은 반시대적이며 반사회적인 인물이다. 종교를 믿는 것이 요즘 시대의 유행이 아니기 때문에 봉완과의 점심식사 대화에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숨긴다. 신춘문예에 글을 쓴 지 6년이나 됐지만, 본선에 입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세상은 ‘재능 없고 미련한 사람’으로 비난하겠지만, 아름은 그것을 숨기지 않고 떳떳하게 내뱉는다. 그냥 계속해서 글을 쓸 뿐이다. 이런 모습은 퇴폐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 의지로 볼 수 있다.

다른 모습으로 보자면, 아름은 ‘자연’에 순응하는 사람이다. 오래된 친구와 사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혼자 살며,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죽었고, 언니는 자궁암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것을 스스럼없이 밝힌다. 그녀에게 있어서 언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 경험은 아름이 ‘자연’에 순응하게 된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그녀가 믿는다는 세 가지를 들어보면 더욱 ‘자연’적이다.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 언제든 죽어도 괜찮다는 것.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은 아름다울 거라는 것. 아름의 믿음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구속하는 현시대의 인위적 제도에서 벗어나, 하늘의 뜻과 같은 초월적인 질서에 맞닿아 있다. 봉완과의 점심식사 자리에서는 함구했지만, 저녁식사 자리에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밝힌 것도,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숨겼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 '그 후'

반면 아름을 제외한 모든 인물은 ‘자연’에 대립된 세계에 사는 인물이다. ‘왜 사는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지만 글을 써 사회로부터 상을 받게 되는 봉완, 불륜 현장에 딸을 예쁘게 치장해 데리고 가는 그의 아내, 불륜을 숨기고 가정을 사랑하는 척한다는 이유로 봉완을 비겁하다고 나무라는 창숙. 이는 ‘주체’의 형성 과정을 거치지 않은, 수동적이면서 수박 겉핥기식의 근대화로 인해 ‘진보’의 탈을 쓰게 된 현시대의 퇴보한 인물이란 점을 보여준다. 모두 믿음과 실체를 분리하고 ‘도덕의 퇴보’를 걷는 인물들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흑백으로 연출된 영화 속에서 유독 아름만 채색적으로 보이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한 플레쉬백으로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대립하는 이유도 그런 의미에서 더욱 부각된다. 더 나아가 영화 제목이 ‘그 후’라는 것도.


영화 막바지에 아름이 택시에서 눈 오는 창 밖을 바라보는 장면은 참으로 ‘아름’답다. 하지만 어쩌면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아름의 마음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부도덕’한 시대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름은 ‘성실성과 열의’와 같은 덕목을 애써 외면할 뿐만 아니라 겁쟁이임을 스스럼없이 밝히는 사회 부적응자이니까. 그러나 누구나 아름을 만난다면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을까. 영화를 몇 번이고 더 보고 싶다. 그 후에 꼭 아름답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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