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루틴은 나를 더 조이기 시작했다

part 2. 루틴이 나를 구할 줄 알았다

by youngvocati

하루하루를 채우면서도

내 안 어딘가에서는 아주 작은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틈새로 스며든 의문은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졌다.


루틴은 여전히 내 삶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움직임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건지,

아니면 제자리에서 빙빙 돌게 만드는 건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었다.


친구들과 놀던 날, 나는 분명 웃고 있었다.

가벼운 농담이 공중에 떠다니고,

노래방에서 열창을 하고,

식당에서 맛있게 먹는 소리가 저녁을 환하게 만들 때,

나도 그 안에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았다.

“오늘 운동을 못 했다.”

“오늘 뭔가를 하지 못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문장들이 나를 뒤에서 잡아당겼다.


하루의 빈칸은 생각보다 무겁다.

체크리스트에 남겨진 작은 공백 하나가

그날의 기쁨을 통째로 먹어치우는 느낌.

즐거웠던 장면들은 뒤로 밀려나고,

머릿속에는 ‘하지 못한 것’만 또렷해졌다.


이상한 건, 놀고 있는 순간에도 마음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거다.

“이 시간이 끝나면 무엇부터 채워야 하지?”

“오늘은 분량을 줄여서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웃으면서도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나는 현재에 머물지 못했다.


사람들은 내게 칭찬을 건넸다.

“넌 정말 부지런하다.”

“어떻게 그렇게 꾸준할 수 있어?”

그 말들이 고맙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칭찬은 나를 가볍게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더 무거운 책임처럼 어깨에 얹혔다.


“그래, 나는 꾸준해야 하는 사람이지.”

그 생각이 아주 얇은 족쇄처럼 손목에 채워졌다.

어느 날은 늦게까지 친구들과 있었다.

“오늘은 그냥 쉬어도 돼.”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불안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씻고 누웠는데도 눈이 감기지 않았다.

결국 다시 일어나 모자란 세트를 채우고,

글자 몇 줄을 억지로 늘어놓았다.

다음 날 아침,

거울 속의 나는 다 채운 사람처럼 보였지만

내 눈은 텅 빈 것 같았다.


루틴은 원래 나를 살리기 위한 틀이었다.

하루를 가늠할 수 있는 눈금,

흐트러짐을 붙잡아주는 손잡이.

그런데 이제는 그 눈금에 맞추지 못하면

내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손잡이를 쥔 게 나인지,

손잡이에 매달린 게 나인지 헷갈렸다.


여행지에서도 그랬다.

풍경은 멀리까지 열리고,

공기는 내 코에 맴돌았다.

카메라는 행복한 얼굴을 가득 모았지만,

나는 틈틈이 시간을 계산했다.

“호텔 들어가면 맨몸운동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스치면

곧바로 죄책감이 따라왔다.

마치 휴식이 곧 배신인 것처럼.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이었나?”

체크리스트는 성실하게 채워졌지만,

정작 내 안은 비어 갔다.

성취감이 차오르는 대신

허전함이 스며들었다.

물감 한 방울이

투명하던 컵이 서서히 탁해지듯,

불안과 강박이 조금씩 색을 입혔다.


내가 두려웠던 건 사실 실패가 아니었다.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까 봐,

그 가능성이 너무 또렷해서.

그래서 나는 더 조이고, 더 채우고, 더 밀어붙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마음은 더 느슨해졌다.

단단해져야 할 자리에

텅 빈 공간이 생겼다.


밤에 불을 끄고 누우면,

눈꺼풀 안쪽에 체크무늬가 떠올랐다.

오늘 채운 것과 비워진 것,

이겼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덮어두고 싶은 것들이 뒤섞였다.

심장이 천천히 박동할 때마다,

“내가 날 움직이는 걸까,

아니면 루틴이 나를 밀어붙이는 걸까.”

질문이 박동을 따라 반복되었다.


다음 날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깨면,

나는 이미 결심한 얼굴이었다.

“오늘은 놓치지 말자.”

운동화 끈을 조이고,

책을 펼치고,

빈 문서를 열어 첫 줄을 쓴다.

몸은 움직였지만,

마음은 어디까지 따라오는지 자신할 수 없었다.

할 일을 다 하고도

안도만 남는 하루가 늘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말했다.

“너처럼 꾸준한 사람이 되어야 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은 내 안의 빈자리를 건드렸다.

나는 꾸준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꾸준함에 쫓기는 사람에 가까웠다.

성실은 남들에게 보이는 표정이 되었고,

내 표정 뒤에서는 공허가 더 또렷해졌다.


어느 날 밤,

체크리스트의 마지막 칸을 남겨둔 채

일부러 불을 껐다.

“그래, 오늘은 그냥 비워두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그 빈칸의 무게를 견뎌 보려 했다.

의외로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한쪽이 서늘했다.

몸 안 어딘가에서

얇은 금속이 끼익, 소리를 내며 조여지는 느낌.

그때 알았다.

루틴은 이미 내 바깥의 규칙이 아니라

내 안쪽에 자리 잡은 기계장치처럼

스스로를 계속 돌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언제부터 결과보다 기록을 더 믿게 된 걸까.

살의 온도보다 숫자의 온도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고,

나의 하루는 내가 무엇을 했는가 보다

무엇을 빠뜨리지 않았는가로 평가되었다.

그 평가의 방식이

나를 얌전하게 만들었고,

조용히 조여왔다.


그래서 나는 요즘,

웃을 때마다 내 표정을 한 번 더 살핀다.

“지금 즐거운가?”

대답이 늦게 따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알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긴장하고,

체크무늬의 그림자를 밟고 걷고 있다는 것을.


루틴은 분명 나를 살리기 위해 만든 틀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 틀은

내 숨의 길이를 재고,

내 하루의 색을 정하고,

내 마음의 속도를 제한하고 있었다.

놀아도 불안했고,

지켜도 공허했다.

성실과 강박이 같은 얼굴을 하고

교대로 나타났다.


나는 서서히 깨닫는다.

문제는 ‘지켰냐, 놓쳤냐’의 싸움이 아니라

‘누가 누구를 붙잡고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나는 루틴을 붙잡고 있다고 믿었지만,

어쩌면 루틴이 나를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 이 문장을 쓰고 있는 나는

도망치는 대신 바라보려고 한다.

불안을 부정하지 않고,

강박을 합리화하지도 않은 채,

그 둘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 한다.

도망치지 않고 바라보면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온다고,

어딘가에서 들었다.


하지만 기록의 마지막 줄에 다다르면,

또 한 문장이 입술에 맺힌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그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날마다 다른 얼굴로 돌아온다.


왜 사람들은 나를 부지런하다 칭찬하는데,

나는 공허할까.


왜 친구들과 웃고 돌아와도

마음은 불안할까.


왜 오늘의 칸을 다 채웠는데도

허전함이 남을까.


왜 나는 지켜도 만족하지 못하고,

놓치면 두려운 걸까.

대답은 없었다.


다만 그 질문들이,

점점 더 나를 조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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