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와 자기 계발 책 사이에서 잠깐 멈춰 선 밤
밤 9시쯤, 책상 앞에 앉았다.
왼쪽에는 해부학 교과서가 펼쳐져 있었다.
종아리 근육 단면 그림이 색색으로 칠해져 있고,
그 옆에는 형광펜으로 밑줄 그은 의학 용어들이 줄을 서 있었다.
바로 옆 책장에는
지금까지 내가 사 온 자기 계발 책들이 꽂혀 있었다.
표지를 한 번씩 훑어보다가
그중 한 권을 빼 들었다.
책을 펼치자 예전에 쳐 둔 밑줄들이 눈에 들어왔다.
형광펜으로 칠한 문장들이 여기저기 번져 있었다.
그걸 보고 나도 모르게 미소가 조금 머금어졌다.
이 줄, 이 형광펜 자국들 하나하나가
내가 한때 내 삶이랑 앞으로의 삶에 대해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보여주는 흔적 같았다.
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내 삶을 어떻게든 바꿔 보고 싶어서
이 책들을 읽었었다.
그 마음 자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책장을 한 장 넘기고 나서
다시 책상을 한 번 둘러봤다.
해부학 교과서와,
밑줄이 가득한 자기 계발 책이
나란히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둘 사이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아무 페이지도 넘기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스탠드 불빛이 두 책 위로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지금 당장 외워야 하는 단어들과,
언젠가의 나를 생각하며 그어 둔 밑줄들이
같은 빛을 받고 있었다.
폰이 책상 위에서 한 번 진동했다가 멈췄다.
화면을 뒤집어 놓고도,
몇 초 동안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이야기가 계속되는 책과,
내가 계속 살아가야 하는 교과서 같은 하루가
책상 위에서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책을 덮지도,
새 페이지를 넘기지도 않은 채로
조용히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스탠드만 먼저 껐다.
빛이 걷힌 자리 위로
두 책의 윤곽만 흐릿하게 남았다.
그렇게 책들을 그대로 둔 채,
나는 어둡게 가라앉은 책상을 한 번 더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한쪽만 정답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