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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과 내재의 양면성

강유원 저, '철학 고전 강의' 3부를 읽고

by 김영웅

강유원 저, '철학 고전 강의' 3부를 읽고


초월과 내재의 양면성


부동의 원동자, 궁극의 현실태, 제1의 원인, 형상, 작용, 목적, 세계의 최고선, 그리고 신.


플라톤에 이어 그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세계의 최고선은 세계를 이루는 부분들의 질서 가운데 놓여 있고, 세계의 지배원리에도 있다. 그 원리는 세계 안에 있기 때문에 내재적이며, 그 세계를 지배하기도 하기 때문에 초월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말했던 완전한 이데아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적인 존재자들 안에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실체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실체적인 것은 불변과 부동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다. 그러나 이 실체적인 것이 생성과 소멸을 거치는 개별자들 안에만 내재되어 있다면 불변과 부동의 성질을 간직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실체는 개별자들과 분리되어 있어야만 한다. 즉 초월적인 성질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이게 되는데, 이 움직임에 내재하여 움직임을 관장하는 것도 목적이다. 목적이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도달점이자 추동하는 힘인 것이다. 이 역시 각각 내재성과 초월성을 말한다. 이처럼 최고선은 내재성과 초월성의 양면성을 모두 가진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는 초월적이고 영원불변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이데아 세계와 구분 지어 말했던 현실 세계, 즉 불완전하고 변화무쌍하며 이데아의 모방일 뿐인 세계 안에 위에 형상이 내재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이 초월성을 강조했다고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내재성을 강조하며 진리를 추구했던 것이다.


3부를 읽으며 내가 주목한 부분이 바로 초월과 내재의 양면성이었다. 고대의 그리스 철학이 내가 알고 있는 기독교 신학과 연결되는,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의 이중적 속성과 연결되는 점이라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내재하면서 초월하는 존재가 기독교 신학에서는 바로 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하나님 백성 안에 내주하시며 인도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세상과 존재자들을 만드시고 관장하시는 초월적인 분이시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 즉 내재와 초월의 양면성인 것이다. 이는 나중에 토마스 아퀴나스를 좀 더 공부하면 제대로 알게 될 것이지만, 기독교 신학이 고대 철학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 기독교 신학이 아무런 배경 없는 무에서 뚝딱 탄생하지 않았다는 점이 새롭게 와닿았다.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초월성에 치우치게 되면 우리가 처한 현실 세계 안에서 함께 하시고 소통하시는 하나님을 배제시킬 위험이 커지게 되고, 반면 내재성에 치우치게 되면 하나님을 이 세상과 분리시킬 수 없는 존재로, 즉 범신론이나 자연신론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이 커지게 되며, 절대적인 기준이 상실되어 모든 가치가 주관적이고 상대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위험이 커지며, 무엇보다 창조주이자 구원자의 초월적인 속성까지 부정될 수 있는 위험이 커진다. 건강한 기독교 신학은 초월성과 내재성을 균형 있게 다뤄야 하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행복, 정의, 진리 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얻을 수 없다는 관점이 플라톤 철학을 기반한다고 할 때, 그 가치들은 초월성을 띤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행복은 저 멀리에 있지 않고 파랑새처럼 우리 주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 정의는 다다를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관계를 공정하게 만들면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 진리는 저 너머의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깨달음으로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내재성이 강조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반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초월성과 내재성 중 어느 하나만 강조되어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순간 그러한 가치들이 가지는 양면성을 놓친다고 본다. 초월성도 내재성도 본질이 아니라고 본다. 이 둘의 균형, 양면성의 확보가 본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를 통해 배운 인간의 이율배반성이 인간의 본성에 가깝듯이 말이다. 인간다움과 인간스러움 모두 인간의 본성을 잘 설명해 주듯이 말이다. 초월과 내재, 이 두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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