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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계라도 괜찮을 수 있는 이유

강양구 저,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을 읽고

by 김영웅

망가진 세계라도 괜찮을 수 있는 이유


강양구 저,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을 읽고


강렬한 붉은 바탕의 화려한 표지가 시선을 강탈한다. 하지만 제목만으로는 이 책의 정체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만화책인가 싶은 착각도 잠시, 부제를 보니 비로소 감이 잡힌다. 다음과 같다: '파국의 시대를 건너는 필사적 SF 읽기'. 그런데 단순히 SF에 대한 독서에세이는 아닌 것 같다. '파국의 시대를 건너는'이라는 표현을 보면 시대상을 반영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SF를 읽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시대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통찰하는 책인가? 싶은 궁금증이 든다. 책장을 넘겨 '들어가며'를 읽고 목차를 보면 완전히 파악이 된다. 이 책은 저자가 오랜 기간 읽어온 수많은 SF 중에서 이 시대를 보며 독자들과 함께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 작품 열여덟 편을 선별하여 그것들이 묻는 질문을 소개하고 시대적인 문제들과의 접점을 다방면에서 분석하고 논하는 방식으로 저자의 통찰을 나누는 책인 것이다.


제목의 '망가진'에서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 시대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다. 수많은 SF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의 일면들이 정도는 다르지만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서 얼추 실현된 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을 때 부정신학의 독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모든 SF 작가들이 진정 바랐던 미래는 적어도 그들이 그린 디스토피아가 아닌 세상이었을 거라고 말이다. 저자 역시 이런 관점을 취한다. 이 시대가 아무리 암울하고 파국 같아 보이지만, 저자가 제목에서 '망가진'이라는 표현을 일부러 사용한 이유일 것이다. 파괴된 세계는 고칠 여지가 없지만, 망가진 세계는 고칠 여지가 남아 있다. 다시 말해, 이 시대를 바라보는 저자의 표면적인 시선은 부정적이지만, 그 이면에는 희망을 머금은 긍정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 책은 우리가 처한 이 현실을 냉철하게 관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SF가 던지는 여러 질문과 메시지를 통해 깊은 성찰을 거쳐 마침내 희망을 노래하는 통찰로 나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는 어떤 거대한 담론의 답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우루과이의 무히카 전 대통령의 문장들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젠장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더라도, 각자가 선 자리에서 재미있게 꿈꾸고, 싸우면 좋겠습니다. 확신컨대, 그러다 보면 분명히 세상은 조금이라도 나아질 겁니다." 책을 다 읽고 나는 다시 이 문장으로 돌아와 동의했다. 무력함도 느껴졌지만 그 가운데 가느다란 불씨처럼 남아 있는 희망을, 그 끈질긴 소망을 나도 붙잡고 싶어졌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우고 싶어졌다. 망가진 세계라도 이런 사람들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책 본문은 청소년 눈높이에 맞춰져서 그런지 매 꼭지를 읽을 때마다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각 꼭지에서 다루는 SF의 내용도 조금 더 보여주고, 그 SF가 던지는 질문과 메시지를 우리 현실의 망가진 부분과 연결시켜 논하는 부분도 조금 더 깊게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덕분에 SF를 거의 읽지 않는 내가 SF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의외의 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책 뒷부분에 나온 '함께 읽기' 편에서도 여러 SF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으니 독자들은 참고하면 좋겠다. 특히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SF가 아닌 듯해 보이는 작품들이 수두룩하니 이런 친절한 소개서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나도 한두 편 골라서 도서관에서 빌려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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