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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회복을 위하여

한병철 저, ‘서사의 위기’를 읽고

by 김영웅

서사의 회복을 위하여


한병철 저, ‘서사의 위기’를 읽고


서사의 위기는 서사의 종말에 대한 경고다. 인터넷, 스마트폰, 동영상, 그리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네트워크 등으로 공급되는 정보의 과포화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오늘날 우리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다. 텍스트와 영상을 대조하며 영상의 폐해를 논한다거나, AI로 인한 인간성 상실 등의 부작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책에서는 그것들보다 좀 더 근원적이고 좀 덜 기술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두 가지 개념 비교를 거듭 강조하면서 말이다. 하나는 정보와 지식의 대조, 다른 하나는 스토리와 서사의 대조이다.


저자 한병철은 이 시대에 지식이 사라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신 모든 게 정보화되고 있으며 그 정보가 모든 곳을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 정보는 새로움을 선보이지만, 새로움은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순간 더 이상 새로운 게 아니게 되므로 자연스레 힘을 잃는다. 그래서 정보는 찰나적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즉 아무런 서사를 남기지 않고, 아무런 맥락도 없이 단편의 더미로써 휘발된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은 또 다른 정보들로 대체된다. 이런 무한반복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여러 미디어들로 인해 무한히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 정작 중요한 지식은 점점 밀려나게 되고 결국 소멸하고 있다. 소위 지식의 종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지식의 위기, 지식의 소멸, 지식의 부재는 원인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정보화되고 있는 이 시대의 열매(결과)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인과응보의 열매를 수동적으로 따먹을 필요가 없다. 저항하고 저항해서 다른 열매가 맺히길 주도해야 한다. 객체로서 정보의 홍수에 빠져 죽지 않고, 주체가 되어 지식의 소중함을 깨닫고, 알리고, 또 지켜야 한다.


또한 저자는 이 대조를 기반으로 해서 이 책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스토리와 서사의 대조를 심화시킨다. 여기서 스토리란 우리가 아는 이야기의 개념이 아니다. 엄마 아빠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혹은 누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들려주는 이야기, 혹은 마음을 담은 은밀한 고백은 여기서 말하는 스토리가 아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혹은 ‘스토리‘가 붙는 여러 소셜네트워크시스템, 이를테면 카카오스토리, 브런치스토리, 티스토리 등을 포함한 여러 블로그들에서 남용되는 스토리를 일컫는다. 맥락도 없고, 성찰도 없으며, 휘발성이 강하고, 소통을 빙자한 보여주기식의 포스팅을 떠올리면 되겠다.


그런 스토리들은 무방비 상태의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에 소리소문 없이 침투한다. 침투하여 장악한다. 장악하여 소비자인 우리들을 조용히 노예로 만든다. 우리 중 누군가는 먹고 자고 싸고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런 스토리들을 읽고 반응하고 또 게시하는 데 사용한다. 이른바 중독이다. 중독도 문제지만, 어쩌면 더 큰 문제는 중독인데 중독인 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는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앞에서 소통을 빙자했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것이 진정한 소통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진정한 소통은 사람을 알게 되는 과정을 뜻한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경험과 생각,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과 재해석, 타자와 세상을 향한 시선과 태도 등(이 모두가 개인의 서사를 이룬다)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뜻한다. 즉 진정한 소통은 스토리가 아닌 서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보로는 한 사람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이는 서류 전형으로만 인사를 단행할 수는 없는 근원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로 도배되는 스토리들의 비대로 인해 점점 서사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게 데이터화(정보화)되고, 모든 게 조각난 스토리로 실시간으로 전시된다. 성찰은 온데간데없고 그럴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해진다. 보여주는 정보와 스토리는 내가 누구인지 알리는 목적보다는 진정한 내 모습을 감추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도구가 된다. 내가 아닌 나의 모습, 좋아요를 받기 위한 최적화된 방식의 정보와 스토리로 거짓된 내 모습을 만들어 진정한 나를 은폐한다. 괴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저자 한병철은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뜻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이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브이로그처럼 아무런 서사가 없는 그냥 보여주기로는 결코 나를 알 수도 알릴 수도 없다. 나를 알거나 알리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정보의 조각들을 전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되는 일상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서사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이 시대에 글쓰기를 권하고 싶다.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유일한 방식이 어쩌면 글쓰기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믿게 된다. 사건을 재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등 소소한 개인의 인생에 서사를 불어넣는 것이다. 저자는 셀카가 텅 빈 자기 복제라고 했다. 글쓰기는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믿는다.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가지 않고, 스토리 전시로 거짓된 모습을 증폭시키고 강화시키는 공허한 작업을 그만둘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대체 방안이라고 믿는다. 정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고, 솔직하게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성찰할 수 있으며, 마침내 타자와 세상을 향한 통시적인 통찰도 내놓을 수 있는 서사의 회복을 꾀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만약 이 메시지가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면, 만약 현재 자신의 모습에서 탈피하고 싶다면, 자, 오늘부터 글쓰기 1일이다. 자기만의 서사를 가지고, 상호 간의 서사를 살려내며, 비로소 함께 사는 서사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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