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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끌어안기

그림자

by 김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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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그림자 끌어안기


그림자가 있는 사람을 멀리 했다. 그 어두움에 전염될까 두려웠다. 세월이 흘러 돌이켜보니 정작 내가 두려워했던 건 그림자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였다. 타자의 그림자가 아닌 내 안의 그림자. 그 숨겨져 있던 어두움이 드러날 것 같아서, 드러나 나를 삼킬 것 같아서, 그렇게 되면 내가 세워온 모든 것들이 무너질 것 같아서였다. 나는 숨고 싶었다. 피하고 싶었다. 나로부터, 가장 익숙하고도 낯선, 가장 가깝고도 먼 존재자로부터.


산이 아름답고 웅장하여 믿음직스러울 정도로 존재감을 내뿜는 까닭은 산이 높기 때문이 아니라 산이 가진 굴곡 때문이다.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함께 만들어내는 하모니. 높음과 낮음, 깊음과 얕음이 자아내는 양극성의 선율이 산의 음영을 연출하고 입체감을 부여한다. 햇살에 비친 밝은 부분이 아니라 햇살이 미처 가 닿지 못하는 깊은 골짜기, 그 골짜기가 머금고 있는 짙고 푸른 어두움. 즉 산의 그림자가 역설적이게도 산의 존재를 평면에서 입체로, 3차원의 현실로 소환하여 내 눈앞에 펼쳐놓는 것이다. 존재의 신비다.


사람도 그렇다. 어두움, 이를테면 슬픔, 아픔, 고난 등을 경험한 뒤 지워지지 않는 흔적처럼 그것의 그림자를 카인의 표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 나는 더 끌린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서보다 더 사람다움을 느낀다. 겉으로 드러난 그 사람의 인지도나 위상 등이 아닌, 말해지지 않는 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산의 깊은 골짜기처럼 그 사람의 음영을, 입체감을, 존재감을, 그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한 번 만나면 또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돌아서면 또 생각나는 사람. 사람의 신비함은 그 사람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다. 사람의 깊이는 곧 그림자의 깊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반백 살이 다 된 나는 더 이상 그림자가 없는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굳이 알고 지내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는 걸 보면 사람을 보는 눈이 과거와 많이 달라진 것이다. 나이 들어가며 좋은 점 중 하나는 인간관계에 그리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그동안 다져온 철학대로 사람을 만나고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데에 있지 않을까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습만 다를 뿐 클론 같이 획일적인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익명성에 묻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사는 비겁한 사람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꺼려하는지조차 모르면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차별하는 비열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겐 특별히 밝은 부분도 없지만 어두운 부분도 없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덥지도 차갑지도 않은 회색의 사람들이다. 아무런 음영도 없이 스스로를 평면으로 환원시킨 사람들, 그래서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기생하듯 숨 쉬고 있는 사람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비린내를 느낄지언정 사람다움은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을 미워할 수만은 없다. 나는 깊은 연민을 느낀다. 이들은 그림자가 있는 사람을 멀리했던 내 과거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산 높이를 높게 하고 더 빛나고 눈에 띄게 하려고 애쓰기에 여념이 없다. 이들이 거하는 회색의 영역은 바다보다 우주보다 넓다. 아무도 그 끝을 모른다. 그뿐인가. 그 안에서는 얼마나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뿐더러 서로가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비극의 현장이다.


이들에게 그림자는 수치일 뿐이다. 어떻게든 숨기던지 가려야만 한다. 그러려면 햇살에 노출되는 순간을 피해야 한다. 이들이 뚜렷한 햇살이 존재하지 않는 회색지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들이 겪는 존재론적 모순은 스스로를 평면으로 추락시켰기 때문에 그들이 동물적 본능으로 원하는 입체의 존재감을 결코 내보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늘 모순을 안은 채로 평생을 회색지대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안에서 살인을 일삼고 이기는 것만이 정의가 되어버린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안타까움에 뭐라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느낀다.


자기 안의 그림자를 맨 눈으로 봐야만 한다. 자기 내면에, 머나먼 과거에 버려진 채 놓인 상처와 아픔의 먼지 쌓인 상자를 맨 손으로 열고 그 안에 담긴 모든 것들을 직시하고 느껴야 한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고통을 호소하고 잊혔던 아픔이 다시 살아나 저 깊숙한 곳을 찔러 쪼갤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그림자를 피할 순 없으므로. 그림자는 존재자와 늘 동행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하므로.


그림자를 피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끌어안는 것이다. 자신의 어두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꼭 끌어안는 것. 존재의 재시작이다. 재창조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두 번째의 삶을 마침내 살아낼 수 있게 되는 순간이다. 내 정직한 존재를 여과 없이 드러내어 나만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내 그림자를 끌어안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러면 타자의 그림자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맑게 개인 두 눈으로 나와 타자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림자는 밝은 햇살 가운데 더욱더 명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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