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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건 없다

위화 저, ‘인생’을 읽고

by 김영웅

당연한 건 없다


위화 저, ‘인생’을 읽고


며칠간 푸구이의 인생을 들으며 어느새 높아졌던 내 마음이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낮아졌다. 내게 주어진 것들, 그리고 내가 무감각하게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로 가득했던 내면에 여백이 생겼다. 감사와 겸손과 사랑이 그 빈 곳을 채웠다. 잊고 있던 충만함이 느껴졌다.


한 사람의 인생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그 시간은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고 넉넉한 열매를 안겨준다. 눈은 가까운 곳이 아닌 먼 곳을 바라보게 되며, 나 하나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비좁던 마음 밭엔 어느새 따스한 미풍이 불어 날카롭기만 하던 이성과 논리를 내려놓고 내가 인간임을, 나약하고 불완전하며 유한한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며, 비로소 삶은 더욱 깊고 풍성해진다.


푸구이의 인생은 개별적인 서사가 깃들어있는 동시에 보편성을 띤다. 특정한 시대와 지역과 문화, 그리고 그 안에 흐르는 고유한 가문의 맥락과 한 사람의 개성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개별성과 고유성을 하나로 꿰뚫는 키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단어다. 한 사람의 인생은 저마다 다르지만, 아무리 달라도 그것은 인간의 삶이기에 보편적일 수 있다. 이것이 푸구이의 인생이 나의 인생이 되고 또 우리의 인생이 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제목 '인생'이 상징하는 바일 것이다.


아버지를 꼭 빼닮은 탓인지 도박을 하다가 가산을 탕진하게 된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를 하나씩 잃어버리게 되는 푸구이의 인생은 그 누구의 인생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꼭 도박이 아니더라도 다른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 휘말려 소중한 것들을 상실하게 되는 과정은 아마도 모든 인생에서 정도를 달리하며 존재할 것이다. 저자 위화가 이 작품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순히 푸구이라는 가상의 인물의 삶을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우리에게 알려주는 게 아니라 푸구이의 인생 서사로부터 우리들 개개인의 인생 서사를 읽어내어 성찰해 보라는 것에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밑줄을 그은 부분 몇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는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이후 장인어른의 강압으로 인해 푸구이를 떠났던 아내 자전이 다시 돌아온 장면이다. 푸구이는 말한다. "자전이 돌아와 우리 집은 완전해졌다네. 내 일을 도울 조수도 생긴 셈이고,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 여자를 아끼기 시작했지."


사람들은 어떤 큰 사건을 당하면 크게 두 가지 행보를 보인다. 이전보다 더욱 비뚤어져 끝장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 막무가내인 경우, 그리고 전화위복으로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경우. 푸구이는 후자였다 (여기서 나는 위화가 도스토옙스키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다행이었다. 그리고 아내 복이 있어 더욱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그 아내를 아끼기 시작했다고 해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도박을 한창 할 땐 아내를 때리기도 하고 면박을 주기도 하는 등 개망나니처럼 굴던 푸구이였는데 말이다. 왜 사람은 이런 극한 고난을 겪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일까.


두 번째는 도박으로 날린 집을 차지했던 룽얼이 공산당 정권으로 바뀌고 난 이후 악덕지주로 몰려 사형을 당하는 장면이다. 푸구이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룽얼이 그렇게 죽고 나니,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뒷목이 서늘하더군. 생각하면 할수록 아찔한 기분이었다네. 옛날에 아버지와 내가 집안을 말아먹지 않았다면 그날 사형당할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니었겠나."


인생이란 참 묘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바로 푸구이와 룽얼의 운명이 저렇게 뒤바뀌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경험할 때다. 과거에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했던 사건이 현재 푸구이의 생명을 보존하게 해 준 셈이 되어버렸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푸구이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자전의 말이 맞아. 가족끼리 매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복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진부할 정도로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룽얼이 사형당한 직후 푸구이의 맥락을 고려할 때 내겐 전혀 다르게 들렸다. 마음 깊이 동의가 되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세 번째는 둘째인 아들 유칭을 학교 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첫째인 딸 펑샤를 다른 사람 집에 맡기게 된 푸구이가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찾아온 펑샤를 업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내 자전에게 결연하게 말하던 장면이다. "우리 모두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펑샤를 돌려보내지 않겠소." 아내 자전은 배시시 웃어 보였고, 웃는 얼굴 위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은 함께한다는 것. 효율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 가족과 함께하는 것은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 되는 가치 중 하나라는 것. 저자 위화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기본적이고 당연한 가치들을 다시금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펑샤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남편이 되었던 얼시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는 장면이다. "아버님, 어머님, 저는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펑샤는 어릴 때 병을 앓은 이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푸구이가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농사일을 해왔다. 결혼할 때가 되었으나 장애를 가진 펑샤를 데려갈 사위가 과연 있을까 걱정했었다. 그때 머리가 어깨에 붙은 신체적 장애를 가진 얼시가 나타났다. 얼시와 펑샤 부부가 아이까지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왜 나는 마치 푸구이와 자전이 된 것처럼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찼던 것일까. 얼시가 저렇게 고백하는 자세 또한 감동이었다. 장애를 가진 채 살아가던 얼시가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여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겐 과연 얼마나 큰 축복으로 다가갔을까. 내 가슴도 벅차올랐다. 그리고 내가 당연하듯 누리고 있는 일상의 모든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게 기적 같이 느껴졌고, 모든 게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가슴 벅찬 순간을 뒤로하고 펑샤는 아이 쿠건을 낳다가 죽고 만다. 몇 년 후 얼시도 죽고, 또 얼마 후 쿠건도 죽고 만다. 푸구이의 가족은 푸구이 손으로 모두 묻었다. 푸구이 가문에 불어닥친 시련의 시작이 푸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시련을 겪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 역시 푸구이였다. 그렇게 혼자 살아남은 푸구이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화자인 '나'에게 들려주어 이 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혼자 살아남은 푸구이로부터 소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은 이상하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이내 이런 결론이 더 현실 같다는, 그래서 더욱더 우리네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 인생은 계속 굴러가는 것이다. 계속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지는 것이다. 그 어떤 가슴 아픈 큰 사건과 사고도 세월에 묻어가며 지나가고야 마는 것이다. 덕분에 그런 것들에 무너지는 인간형을 다루는 신파조의 소설이나 드라마, 혹은 영화들이 이 작품 '인생' 때문에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여전히 낙관적으로, 그러나 연륜을 지닌 지혜자의 낙관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푸구이의 뒷모습이 처량해 보이지 않아 책을 덮으며 마음이 흐뭇했다.


자극적이고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로 도배되어 실제 우리의 인생을 오염시키고 있는 많은 문학작품들에 혈안이 된 현대인들에게 나는 위화의 '인생'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푸구이의 인생을 자극적인 문학작품 속 주인공의 인생과 비교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어느 것이 진짜 인생 같은지, 어느 것이 진짜 인생이어야 할 것인지 깊이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위화의 작품들을 더 읽어볼 요량이다. 그의 낯선 시선이 반갑고 도전이 된다.


#푸른숲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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