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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웅 Apr 05. 2021

문학의 저항성

문학의 저항성. 


우린 현실세계에 살면서 비현실적인 장면들을 자주 목도하기도 하고, 몽상과 상상으로 일궈진 허구 세계를 여행하다가 너무나 현실적인 장면들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현실세계의 비현실성, 비현실 세계의 현실성을 일상이 될 정도로 빈번하게 접하는 시대가 바로 오늘날이라 할 수 있겠다.


이성과 논리로 가득 찬 명제적 글쓰기 (저널리스트, 칼럼가 등으로 불리는, 소위 ‘공인된 필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 그러나 알고 보면 대다수는 글 자체보다는 글쓴이의 지위와 유명세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써진 숱한 글들)는 이러한 가시적인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뻔한 대안이나 그럴듯하게 내놓는 역할을 할 뿐이다. 조금 폄하하는 뉘앙스도 묻어나겠지만, 그런 글들은 그저 공식에 따른 글들일뿐이다. 그런 글은 글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바람처럼 쉽게 사라지고 잊힌다. 


그러나 문학은 다르다. 문학은 본질을 꿰뚫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가장 큰 이유는 문학 자체가 두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성이 거세된 명제적 글들은 모두 현실세계에만 속하기 때문에 비현실 세계의 현실성을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을 것이며, 그런 것들은 개나 줘버리라면서 폄하하고 무시하고 조롱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건 말도 안 되는 폭력이며 교만의 극치다. 


현실세계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분석도 할 줄 모르면서 비현실성의 현실성을 언급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글이 있다면 그건 문학이 아니다. 무속이고 반지성일 뿐이다. 이런 면에서 문학적 글쓰기는 명제적 글쓰기 (소위 과학적 글쓰기라고도 불리는)를 구사할 줄 모른다면 불가능한 일이 된다. 현실의 비참함을 모른 채 핑크빛 구름 위 세상만 언급한다는 건 현실에 대한 모독이며 모욕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의 특징들을 파악한 이후 작가는 그 특징들을 일목요연하게 기술하는 글에만 머물지 않고 문학적 글쓰기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문학은 바로 이런 것들을 담고 표현하는 글들을 말한다.


누가 더 세밀하게, 누가 더 정확하게 관찰보고서를 쓰고 분석 보고서를 쓰는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자기의 글쓰기를 뽐내는 사람들을 보면 이젠 웃음만 나온다. 번듯한 지위 (이를테면 교수, 의사 등등) 덕분일 뿐인데 마치 자신의 글이 ‘공인된 필력’으로 써진 글이기 때문에 청탁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그 자리에 맞게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행동하는 자들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 ‘공인된 필력’? 청탁한 사람은 청탁받을 사람의 허영심을 자극하고 독자들이 쉽게 빠지는 ‘권위에의 오류’를 이용하며 상업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라는 걸 왜 모르는 걸까? 


글이란 건 그 사람을 궁극적으로 대변하게 되어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두 편의 글로는 파악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세계관과 사상 등이 문체와 문장력으로 드러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글을 청탁하는 사람은 보통 이런 건 개의치 않는다. 그저 그 사람이 교수인지 의사인지 등등을 보고 그 사람의 영향력을 볼뿐이다. 글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니 제발 착각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그리고 생각해 보라. 어찌 교수나 의사들만 글을 잘 쓸 수 있겠는가. 뭔가 이상하지 않는가. 문학적 재능은 그렇게 사회적 지위를 가진 소수의 사람에게만 부여되는 복 따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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