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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웅 Apr 23. 2021

작가의 글: 고뇌와 미련의 텍스트

어떤 글을 쓸 것인가.

작가의 글: 고뇌와 미련의 텍스트.


쓰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들 앞에서 나는 언제나 작아진다. 나는 언어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가 되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가슴 벅차오르는 감동에 짓눌려 얼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나는 잠시 후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더듬이가 되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게 된다. 제한된 언어와 제한된 시공간, 그리고 제한된 나의 상상력과 글쓰기 역량이 언제나 아쉬울 뿐이다. 아, 내가 느낀 것들을 단 10퍼센트만이라도 글로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래서 글은 언제나 미련이 묻어나는 법이다. 글로 담아내지 못한 90퍼센트 이상의 것들이 흐르는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끝내 살아남은 10퍼센트의 텍스트에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 풀어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한계를 받아들이고 겨우 표현한 글 몇 자로 작가는 독자에게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때 과연 독자는 텍스트에 담기지 않은 작가의 90퍼센트를 가늠할 수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작가 자신도 소화해내지 못한 그 100퍼센트를 어찌 알아챌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미 써진 10퍼센트의 텍스트만으로 작가를 다 이해한 것처럼 함부로 판단이나 해대지 않으면 다행이다. 작가는 그러므로 독자에게 100퍼센트 공감과 이해를 기대하지 않는다. 아니, 기대할 수 없다. 그저 오해가 생기지 않기만을, 뜻이 엉뚱하게 해석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글은 먼저 작가의 쏟아냄이다. 독자의 입맛에 맞추기 위하여 10퍼센트에 올인하는 작가의 글은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대중적인 글, 잘 읽히는 글의 가치를 폄하하는 게 아니다. 글의 목적과 결과를 혼동하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글은 작가의 10퍼센트 만을 드러낼지라도 90퍼센트의 숨은 텍스트를 머금고 있다. 이런 글이 참된 글이다. 비록 대중적이지 않고 널리 읽히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반면, 아무리 대중적이고 널리 읽히더라도, 텍스트로 드러난 10퍼센트가 전부인 글, 그 뒤에 숨은 게 아무것도 없는 글은 공해와도 같다. 있으나마나 한 글. 작가는 언제나 드러내지 못한 90퍼센트를 고뇌하며 그것이 미련으로 남아 드러난 10퍼센트의 텍스트로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진짜 작가다. 독자의 입맛에 휘둘리지 않는 작가. 글의 힘은 거기에서 온다. 글의 가치 역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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