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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의 충돌

헤르만 헤세 저, ‘데미안’을 읽고

by 김영웅

두 세계의 충돌.


헤르만 헤세 저, ‘데미안’을 읽고.


1. 과거 편 – 문학세계로의 안내자, ‘데미안’.

추리소설을 탐독하던, 아니 추리소설"만" 읽던 시절이 있었다. 88 올림픽이 끝나고 1990년을 넘어가던,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였다. 운 좋게 나는 주산 학원을 함께 다녔고 또 동네 슈퍼마켓 아들이기도 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부잣집 아들 녀석은 일란성쌍둥이였는데, 유별나게 똑같이 생겨서 한 놈은 귀가 길쭉하고 한 놈은 상대적으로 짧다는 사실로 난 그 둘을 구분했던 기억이 난다. 의도적이었는지 아닌지 확실친 않지만, 난 꽤나 그 쌍둥이 녀석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가끔 그 집에, 그러니까 슈퍼마켓에 가면 걔네 어머니로부터 사탕이나 불량식품을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그게 너무 좋았다.


우리 집과는 달리 그 쌍둥이 집에는 둘이 같이 쓰는 방이 따로 있었는데, 거기엔 셜록 홈스 전집이 갖춰져 있었다. 부럽기도 하고 멋져 보이기도 했다. 물어보니 자기네들도 한창 읽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몇몇 친구들이 몇 권을 벌써 빌려갔다고도 했다. 나도 그 책이 읽고 싶어 졌다. 그렇게, 뭔지 모를 경쟁심리와 함께 난 추리소설의 세계로 입문하게 된다.


매주 용돈 오백 원이었던 그 시절, 빨간색 아가사 크리스티의 책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손에 넣기 위해 난 허구한 날 동네 헌책방을 찾았다. 어떤 때는 감질나게도 누군가가 일주일에 꼬박꼬박 그 시리즈 책을 한 권씩 팔았는지, 아니면 헌책방 주인아저씨가 창고에서 일부러 야금야금 매주 한 권씩 밖에 꺼내놓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빨간색 커버의 반양장 책이 날 기다렸다는 듯이 내 눈에 띌 때면 난 두 팔 벌려 과감하게 용돈 오백 원을 올인하여 그 책을 사냈다. 그럴 때면 난 희열을 느꼈다. 여러 군데 도서관에 가서 빌리기도 하고, 명절이나 생일이 되면 받을 선물 목록에 읽지 않은 그 빨간 책 제목을 올려서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난 몇십 권이나 되는 그 시리즈를 용케도 다 읽어낸다. 아 그때의 성취감이란!


중 2 때였다. 학교를 마치면 방에 들어가 책상에 처박혀 침침한 백열등 하나를 켜놓고 그 빨간 시리즈 책을 읽어댔다. 그 미련함 덕분에 난 안경을 쓰게 되었다. 젠장. 돌이켜보면 지금도 가장 후회하는 시점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추리소설은 그렇게 읽어야 제 맛이었다. 범인이 누구일까 맞춰도 보고, 탐정 포와로가 어떻게 사건을 풀어가는지도 세세하게 살펴보려면 한낮의 밝은 태양은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을 나만의 동굴 속에서 다 읽었을 땐, 마치 내가 탐정이 된 것 같았다. 눈을 어슴푸레 뜨고 엄마나 아빠나 여동생을 째려보기도 했었던 것 같다.


없는 가정형편에 안경까지 써야 하는, 예상 밖의 지출을 하게 되자 엄마가 조금 걱정이 되셨는지 나에게 한 권의 문학책을 선물하셨다. 추리소설의 늪에서 빠져나오길 바라시는 눈치였다. 색지에는 친히 글도 써주셨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나의 문학적 감수성과 성장을 바란대나 뭐래나, 어쨌든 "좋고 건전한" 코멘트였다. 그 책은 손에 착 잡힐 만큼 들고 다니기 용이했었고, 표지의 색깔은 풀색이었던 것 같다. 진한 초록이나 연한 초록도 아닌 풀색깔. 그리고 그 책의 제목은 "데미안"이었다. 그렇게 "데미안"은 나를 추리소설의 세계에서 문학의 세계로 이끈 안내자가 되어주었다.


2. 현재 편 (1) - ‘데미안’ 다시 읽기.

나에게도 두 세계가 있었다. 클리블랜드에서 인디애나로 이사 오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눈에 보이는 내 주위의 거의 모든 환경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나의 내면의 변화가 컸다. 심이 깊게 박힌 티눈처럼 내 안에 깊숙하게 각인되어 있던 성공지향적 가치관이 비로소 그 뿌리를 드러내고 참혹히 잘려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버렸다. 그 죽음이 끝일 것 같아 온 힘을 다해 잃지 않으려 버텼지만, 그 유아적 생명은 죽어야만 했던 세계였다. 그리고 난 이렇게 살아있다. 더 강해진 모습으로. 그렇다.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듯,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만 했던 것이다.


인간은 어쨌거나 성장하는 법이고, 그 성장은 언제나 두 세계의 만남을 기반으로 한다. 성장은 변태이자 진화다. 같은 것 같으나 다른, 다른 것 같으나 같은 모습으로의 탈바꿈이다. 단지 수평적인 세계로의 이동이 아니라, 기울기가 있어 보다 높은 차원을 가진 세계로의 상승 진입이다. 그 과정은 또한 치열한 투쟁의 연속이기도 하다. 그래 봤자 동일한 육체를, 아니 죽음에 좀 더 가까운 육체를 지니게 되겠지만,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들며 자신을 이루는 내면세계는 점점 그 깊이를 더해간다. 어찌 보면 무한급수로 이루어진 카오스의 프랙털 모습과도 비슷할, 그래서 부분이 전체의 작은 닮은꼴인 동시에 전체가 그 작은 부분의 모습과도 같은, 그러면서도 어떤 규칙과 패턴을 가지는, 그러나 끝내 완성되지 않을 무한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그렇다, 인간의 성장은 신비다. 그 자체로 신비한 존재인 인간이 ego를 넘어 self의 단계로 진화하는, 처음에는 의식세계가 다인 줄 알았지만 곧 무의식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고, 그 인식된 무의식은 해석과정을 거치며 의식세계로 넘어와 의식이 되고, 이는 또다시 하나의 무의식 세계를 넓히는 역할을 하게 되는, 이 신비한 과정이 우리 인간의 숙명이자 바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데미안"은 그저 싱클레어라는 사람이 자신의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의 성장과정을 시간 순으로 그린 청소년 드라마라든지 회고록이 아니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철학적이고도 심층심리학적인, 그러면서도 굉장히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걸작이다. "데미안"을 15살에 읽었던 과거의 나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가치관의 큰 변화를 겪어낸 마흔이 넘은 현재의 나는 달랐다. 이 책의 심층구조가 보였다. 작가의 의도를, 완전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수십 년 전보다는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세계라는 개념은 물론, 이 책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보이는, 투쟁하며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어가는 과정과도 같다는 것, 아프라삭스라는 신이나 에바 부인이라는 살아있는 인격체로 표현되는 것이 삶의 전체성이라는 사실까지도 이해가 되었다.


이 비약적 발전이 25년이란 세월의 힘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다. "반"의 결과, 즉 "데미안"이 남겨놓은 몇 가지 추가적인 질문이 나에게 생겼다. 이는 내가 최근에 깨뜨리고 나온 성공지향적 가치관이라는 알의 세계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의 산물인 동시에 하나님나라라는 진정한 아프라삭스를 만난 열매일 것이다.


3. 현재 편 (2) – ‘데미안’, 내 삶에 적용하여 다시 읽기.

“데미안”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던 25년 전에도 이 문구는 강렬하게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읽었던 책의 풀색 표지에도 새 그림과 함께 적혀 있었던 것 같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아프락사스는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는 총체적 존재다.)


김나지움에 입학하고 싱클레어는 크로머 사건 이후 두 번째로 잠시 동안이지만 어두운 세계로의 방황을 하게 된다. 그러나 카인의 표를 지니고 있었던 탓인지, 근간이 흔들리지 않은 채 연극 아닌 연극으로써 방황을 곧 종료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이를 계기로 탄성처럼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 같지만 다른, 좀 더 통합되고 성숙해진 그 자리로 돌아오는 길은 아주 힘겨운 투쟁으로 그려져 있다. 그 투쟁의 상징적인 길잡이는 꿈과 기억이고, 목적지는 데미안이었다. 그리고 길잡이가 자극이었다면, 그에 대한 싱클레어의 반응은 그리기였다. 한때 데미안이 스케치를 해갔던, 자기 집 문장에 새겨진 새를 그려나갔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 새는 싱클레어가 자신의 그림을 데미안에게 우편으로 부치고 난 이후, 데미안으로부터의 답장이라 여기는 종이쪽지에 적혀 있었던 문구 덕분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그 새는 다름 아닌, 변태와 진화를 거치며 또 다른 한 세계로부터 빠져나오려 홀로 투쟁하며 성장하고 있는 싱클레어 자신이 투영된 실체였던 것이다.


청년이 되어 재회하게 된 데미안과의 만남은 유년시절의 그것과는 달랐다. 데미안은 늘 그랬듯, 어른인지 아이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신비한 존재로, 하지만 더 완전해진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싱클레어는 한층 성장하여 그의 카인의 표가 더욱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싱클레어와 데미안과의 재회 이전에 싱클레어는 또 다른 내적 성장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 역시 꿈과 기억을 재료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종합해가며 자신의 개성화를 이루어갔다. 그때 역시 싱클레어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번엔 새가 아니라 사람 얼굴이었다. 베아트리체 같기도 하고 데미안 같기도 하고, 자신의 모습과 닮은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지만 뭔가 종합적이고 성숙한, 마치 아프라삭스의 얼굴과도 같은 그림을 그려나갔다. 데미안과의 재회 후 싱클레어는 그 그림 속 주인공이 실제로 살아있는 인격체로도 존재함을 발견하고 경탄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이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프라삭스는 눈에 보이는 에바 부인과 같은 의미로써 총체적인 삶과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 잠자고 있던 고유한 특징을 인지하고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 자신도 몰랐던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고독한 과정. 그 힘겨운 투쟁과도 같은 과정. 카인의 표는 아마도 한 사람의 고유하고도 순수한 특징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데미안은 한 발 앞선, 그러니까 그 과정을 이제 막 시작하거나 시작할 조짐이 보이는 싱클레어와 같은 자에겐 목표이자 길잡이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린 시절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나타난 시점은 아주 적절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크로머 사건 때문에 처음으로 다른 세계로 넘어가게 되어 방황하고 좌절하고 있던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구원자와도 같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데미안도 어떤 신이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 그저 그 길을 먼저 앞서간, 카인의 표를 가진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싱클레어는 청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모습 속에 데미안이 있다는 걸 보게 되며 깨닫게 된다. 즉 "데미안"은 싱클레어와 데미안이라는 특정 두 사람의 시시콜콜한 성장과정이라기 보단 우리 인간의 보편적이고 숙명적인 성장과정임을 해석해 낼 수 있다. 싱클레어나 데미안이나 모두 우리의 인생이라는 곡선의 순간 기울기 값이다.


그런데 문제는, 싱클레어는 용케도 빗나가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를 다른 세계의 그것들과 잘 분별하면서 결국은 더욱 강한 모습으로, 마치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그래서 데미안이나 에바 부인이나 아프라삭스와도 같은 얼굴을 가지게 되지만, 과연 이 "긍정적인 결과"도 일반화할 수 있냐는 것이다. 말했듯이, 그 과정은 힘겨운 투쟁이다. 어둡고 무섭고 강력한 자극, 압도적인 분위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본인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그것과 상관없이 그 과정 중 무너져버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지 않겠냐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 역시 이미 헤르만 헤세도 알고 언제나 카인의 표를 가진 사람들은 다수가 아닌 소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는지도 모르지만, 분명 이 책에서는 그 성장과정을 "어떻게 해야 바르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그저 스스로의 내면적 의지에다 호소만 할 뿐 그 이외엔 일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마치 뉴에이지 사상처럼, "당신도 할 수 있다. 당신 안에는 무한한 힘이 잠재되어 있다. 그것을 끄집어내어 스스로 신이 돼라."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해석과 결론에 이르면 갑자기 "데미안"이 너무 허무해져 버리기까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내 해석이 맞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하나님나라라는 알수록 깊고 모든 것을 포괄할 정도로 넓은 가치관을 받아들였기에,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과 신앙 없이 과연 그 인간의 개성화 과정을 온전히 거칠 수 있을지, 그게 의문인 것이다. 원래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닌, 철저하게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서 인간 내면에 형성되는 가치관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데미안"에서 말하는 개성화 과정에 대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두 세계의 만남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절차를 거쳐 보다 종합적이고 보다 깊고 보다 넓은 가치관으로 진화하는, 두 가치관/세계관의 만남과도 같기 때문이다.


"데미안"에서는 신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신은 철저하게 싱클레어의 성장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저 어딘가 높은 곳에 거룩하게 존재하는, 마치 철학자들이 무수히 많은 모습으로 그려왔던 "진리"나 "이상"과도 같은 존재 정도로만 그려진다. 또한 이는, 신은 존재하나 인간의 삶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신론이나, 신이 있든지 없든지 그건 인간들이 알 바 아니라는 입장의 불가지론에서 해석되는 신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비록 책에선 에바 부인이라는 인격체로 그 신의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에서 말하고 성경 전체가 말하고 예수님의 핵심 사상이자 복음의 정수인 "하나님나라"는 인간이 규정해 놓은 모든 차별을 뛰어넘는다. 좌로는 자유주의 세계관, 우로는 근본주의 세계관이 있다면, 그 밸런스를 맞추는 하나님나라는 정중앙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좌우의 날개를 포함하는 몸통이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치관이 한쪽에 있고, 또 다른 한쪽엔 비기독교인들과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일상에 대한 가치관이 있다면, 그 신앙과 삶에 대한 밸런스를 맞추며 통합하는 가치관이자 세계관은 바로 하나님나라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이 있고, 또한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이 있다면, 그 두 가치관의 중심을 관통하여 하나로 엮는 동시에 비로소 온전한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가치관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세계관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러므로 "데미안"에서 다루는 두 세계의 충돌은 인간의 의가 중심에 놓인 세상적인 가치관 (성공지향적 가치관과도 같은)과 하나님의 의가 중심인 하나님나라 가치관과의 충돌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충돌 과정에서 힘겹게 투쟁하는 인간의 성장과정은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과도 같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면 그 힘겨운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중립적인 인간의 숭고하고도 강한 의지라기보단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만약 헤르만 헤세가 융의 심층심리학만이 아닌 하나님나라라는 개념을 알았더라면, "데미안"을 좀 다르게 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하나님나라라는 기독교 가치관/세계관을 알게 되고 그것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과정"으로 말이다. 물론 그랬다면 노벨 문학상은 받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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