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버둥 치지 않기
아무래도 ‘황량함’이라는 단어는 더위보다는 추위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온도계는 오늘 새벽 처음으로 영하를 가리켰다. 어젯밤 일찍 잠에 들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새벽 4시경 눈이 떠졌다. 다시 잠들려고 노력했지만 삼십 분 넘게 뒤척이기만 했다. 곤히 자는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조심 침대에서 미끄러져 나와 나는 거실로 향했다. 커다란 창을 덮고 있는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히고 나는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머리를 통과하지 않고 가슴팍에 박힌 한 단어, 황량함. 신세계백화점과 호텔 오노마가 내뿜는 화려한 네온사인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인공적인 아름다움은 그 황량함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허허벌판과 영하의 추위, 그리고 화려한 네온사인. 황량함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다 적합한 조합이 있을까. 내 마음도 그와 같다는 생각에 나는 잠시 창을 열고 영하의 대기를 피부로 맞이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때론 발버둥 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으로 들어갈 때 문제도 나도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시계를 보니 5시였다. 나는 깊은 잠을 아침까지 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