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구: 두려움이 아닌 존중
“두려움은 근본주의를 만들지만 참된 신앙은 두려움을 이긴다.” 박영식 교수가 한 이 말은 내게 오래 남았다.
이 말은 두려움을 주 무기로 이용하는 종교가 과연 진리를 추구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내가 아는 진리는 자유와 해방과 평화가 언제나 함께 한다. 내겐 진리는 담대하고 순결하며 완전하다는 믿음이 있다. 두려움은 그 어디에도 기생할 수 없다. 씨조차 말라버린 곳이다.
숨기는 자가 범인이라는 말은 뼈가 있다. 숨기는 이유는 두려움이다. 자신의 정체와 자신의 범죄가 탄로 날까 두려운 것이다. 숨기고 숨는 건 모든 범죄자의 기본적인 반응이다. 즉 두려움은 죄가 인간에게 일으키는 원초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두려움이 만드는 근본주의라는 실체는 쉽게 범죄와 범죄자라는 단어와 연결된다. 놀랍게도 이 연결은 근본주의자들에 대해 내가 받은 인상의 단면을 잘 설명해 준다. 그들의 세상은 자발적인 순종이 아닌 금지와 금기의 세상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금지와 금기를 만든 선구자도 한때는 순수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자였을 것이다. 모든 인간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나 자기만의 선과 악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춰 어떤 대상에 대한 편향되고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게 된 이후 그 자는 스스로 갇힌 자가 된다. 그 대상을 향한 두려움은 순식간에 그 자를 삼키고 그를 장악하고 제어하기 시작한다. 그 자는 어느새 그 대상을 악마화시키고 두려워하면서도 그 대상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노예 된 자의 삶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자신이 섬기는 대상을 향한 복종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노예가 처한 상황에서 주인에 대한 복종이란 평범한 노예에게서 찾을 수 있는 복종과는 다르다. 이 자의 특별한 복종은 곧 처음에 스스로가 정했던 악마화된 이미지를 반복, 강화시켜서 자신의 사상과 신념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어느새 그 자는 고립되고 단절되며 자기편을 찾기에 급급해지고, 급기야 그 사상과 신념은 진리가 되고 삶의 목적이 되며 구원의 길이 되기에 이른다. 그 대상만 피하거나 거부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것처럼 자신의 모든 논리와 교리가 통합되고 수렴되는 것이다. 마침내 과녁에서 벗어난 열매가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아는, 두려움이 만든 근본주의라는 이미지에 가깝다.
두려움에 점철되고, 주관과 편향이라는 좁은 우물 안에 스스로 갇힌 자가 되어 마침내 원래 쫓던 진리의 자리에 자신이 악마화시킨 대상에 대한 금지와 금기를 올려두고 숭배하는 집단. 아무래도 나는 이런 집단 안에서 진리를 좇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두려움이라는 칠흑 같은 구름은 선구자가 일궈놓은 열매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집단의 추종자가 되어버린 사람은 그 구름 기둥을 쫓을 필요가 없다.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이유 없이 무엇인가를 금지하고 금기시하는 자가 당신 앞에 있다면 그 자가 바로 범인이다. 범인을 쫓으며 함께 하면 공범이 될 뿐이다. 착하고 성실한 해적을 따라가면 해적선에 올라 해적이 될 뿐이듯이. 나오라. 돌아서라. 떨쳐 버려라. 적어도 그 어둠의 세력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는 있을 테니.
반면, 참된 신앙은 두려움을 이긴다는 문장은 내게 힘이 되었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존중이라는 생각을 한다. 존중은 두 가지 의미를 띤다. 하나는 원래 추구하는 대상에 대한 존중이다. 이는 존경 혹은 숭배라고 해도 되겠다. 기독교 맥락에서 보자면 그 대상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니까. 나머지 하나는 자칫 두려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자세다. 그것은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일 테고, 그 결과 오랜 시간 탄탄하게 간직해 온 전통과 교리의 재해석을 요구하는 계기가 된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신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신학자의 첫 번째 자세가 새로운 대상에 대한 적대감이 아닌 존중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물론 이때의 존중이란 추종이 아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는 말에 가깝다. 번거로워 보일 수도 있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그게 바로 게으름이 되고 두려움으로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고 생각한다. 우르르 몰려가는 우매한 군중들이나 사리사욕에 온몸을 맡긴 채 정치적인 이유로 잘못된 사상을 선택하는 지식인들이 아닌, 전통이나 교리만이 아닌 신앙의 본질과 하나님의 속성을 전제한 사람의 목소리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약간의 두려움을 동반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증폭시키고 사상과 신념으로 확산시키고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확장시키는 건 새로운 것이 아닌 그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대상의 악마화는 많은 경우 대상이 악마이기 때문이 아니다. 범인은 그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처리하는 당사자다. 나는 이것은 범죄행위로 보며 근절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두려움이 아닌 존중의 자세로 대상을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따져보는 것. 이 단순한 행위가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탈출구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