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
사람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로 과거에 겪은 어려움 (환란 혹은 시험 등)의 유무를 들 수 있다. 물론 어려움은 상대적이라 정의하는 게 쉽지 않고 각 사람의 어려움을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려움을 통과한 이후 그 사람의 변화된 삶에 대한 자세 혹은 타자를 향한 태도는 충분히 그 사람의 성숙도를 판단하는 신뢰할 만한 잣대가 된다. 물론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어려움의 유무도 의미 있다고 하겠지만, 단순히 그것의 유무가 아니라 그 시간들은 어떻게 지나오고 어떻게 재해석하며 어떻게 그 재해석을 현재 삶에 적용하는지에 방점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의미심장한 일을 겪고 (1단계),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한 뒤 (2단계), 자기 자신과 타자와 세상을 대하는 삶이 일상에 얼마나 바뀌었는지 (3단계)가 관건이다.
편의상 1-3단계로 성숙화 과정을 나눴지만 어디까지나 설명을 위해서이며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어떤 단계는 놓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볼 만한 거리난 되리라 믿는다. 이 글에선 두 가지 서로 다른 꼰대의 유형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유형:
1단계를 겪고 2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다. 많은 경우 원래 가지고 있던 자신의 작은 세계관을 더욱 고집하게 되고 그 결과 1단계를 겪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법한 사람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들은 1단계를 겪어낸 그 자체를 훈장으로 여긴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어려움이 그 어떤 사람이 겪은 어려움보다 더 대단한 것처럼 믿고 으스대며 타자의 어려움을 얕잡아본다. 마치 인생을 달관한 것처럼, 마치 모든 어려움을 초월한 것처럼 자기기만과 자기 우월감에 도취되어 판단하고 가르치고 정죄하는 자리에 스스로 오른다. 정치적으로는 극보수에 가깝고 새로운 모든 것에 닫힌 자세로 대하며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타자까지도 자기처럼 만들려고 한다 (a.k.a. 물귀신). 꼰대의 극치요, 인간 말종에 가깝다고 보며 가장 피해야 할 사람이다.
두 번째 유형:
2단계로 나아갔으나 3단계로 진입하지 못한 채 늘 생각과 삶 사이의 괴리 때문에 갈등하는 사람들이다. 생각도 바르고 결단까지 했지만 여전히 삶은 2단계를 겪기 전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말만 바른 사람, 무늬만 XXXX인 등의 치욕스러운 말을 자주 듣게 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첫 번째 유형과 궁극적으로는 같은 삶을 산다. 생각은 반대일 수 있지만 말이다. 자신의 옳지 못하고 옹졸하고 편협한 생각을 강화하면 첫 번째 유형이 되고, 자신의 기존의 생각을 부정하면 두 번째 유형이 되는 것이다. 즉, 생각의 변화와 상관없이 결국 삶을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관건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이들은 변명과 핑계에 능하다. 미꾸라지처럼 상황논리를 펴며 A 혹은 B, 둘 중 자기 유익에 부합하는 쪽을 선택하고 어떻게든 합리화를 하며 위기를 모면하는 임기응변의 대가다. 배우고 말이 통하는 것 같지만 속은 전혀 다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할 부류에 속한다. 또한 누구와 함께 하는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페르소나) 살아가는 경우가 흔하므로 정말 조심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꼰대의 극치가 1단계 통과한 자체를 훈장으로 여긴다면, 이 부류의 사람들은 2단계를 통과한 자체를 훈장으로 여긴다고 봐도 무리가 없겠다.
위에 언급한 두 가지 꼰대 유형은 모두 자기의 경험을 훈장으로 여기는 인간들이다. 꼭 피하자. 그런데 현실에선 피할 수가 없다. 아마도 세상의 끝이 올 때까지 존재할 것이다. 에휴. 그래서 결국엔 그들과 어떻게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 함께 살아가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이 있어야 하고 이 문제에 대해 늘 공동체 내에서 건전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이들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바른 잣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정말 산 넘고 산이라 건강한 생각과 건강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정말 축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나는 이런 것들이 이루어져야 할 공동체가 바로 교회여야 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