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과 참회 사이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재독 감상문에도 썼지만, 초독 때 보이지 않았던 것 중 가장 인상에 남는 부분은 스따브로긴의 캐릭터에 관한 것이었다. 어제저녁 독서모임에서 세 시간 동안 나누다가 조금 더 정리가 되기도 했던 부분이다.
먼저 스따브로긴은 선과 악에서 모두 만족을 느낀다는 점, 그 무엇을 해도 자기 통제가 가능하여 어떤 사상이나 이념 혹은 악령에 사로잡히지 않고 스스로의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행동을 한다는 점,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남다른 힘을 잘 알고 있으며, 유치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모욕적일 수도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범죄 행위에 해당될 수도 있는 짓을 할 때 그 힘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의 신적인 우월함을 다시 한번 목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기가 저지른 파렴치한 범죄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은 그의 신적인 우월함을 더 확고히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는 자기 주관에 의해서 모든 것을 행하면서도 자기 객관화를 할 줄도 알아 무엇이 인간 세계에서 옳고 그른지 파악하고 있었다. 마치 악령이 인간의 몸을 입고 존재하는 인물처럼 느껴질 만큼 말이다.
어제 나눔에서 스따브로긴과 비슷한 사람을 살면서 만난 적이 있냐는 질문이 나왔다. 내가 물었다. 스따브로긴과 비슷한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냐고. 정체를 잘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때 뭔가 섬광처럼 번쩍 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정리가 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그게 바로 악령의 본질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미쳤던 것이다. A인 것 같기도, B인 것 같기도 한 사람. 혹은 A이기도 하고 B이기도 한 사람. 도대체 정체를 알기 힘든 사람. 우유부단하거나 소극적이거나 내성적인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스따브로긴은 전혀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우월한 힘을 스스로 잘 알 만큼 자신감이 넘쳤으며, 무언가에 꽂히면 해 버리는 담대함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색깔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스따브로긴이었던 것이다. 마치 악령처럼 말이다. 잡히지 않는 존재. 파악하기 힘든 존재. 눈앞에 존재하지만 그 육신은 껍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만드는 존재. 그가 바로 스따브로긴이었던 것 같다.
찌혼 신부와의 대화에서 나는 스따브로긴의 한계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거짓 하나 보태지 않고 자백할 만큼 솔직하고, 또 그만큼 강한 인물이었지만, 단 한 가지 그가 부끄러워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참회’였다. 참회. 자신의 죄를 그대로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는 용기 (참고로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과거의 죄도 포함된다)가 있었으면서도 누군가 앞에서의 참회는 끝내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했던 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나는 이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인 죄를 인정하는 것과 그 죄의 더러움과 그 죄가 타자를 어떻게 죽게 만들었는지 주관적으로 개인적으로 머리뿐 아니라 가슴으로 깨달아 인정하는 것의 차이일까? 죄 인정과 참회 사이의 간극은 그렇게나 초월적인 힘의 소유자도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할 만큼 넓었던 것일까?
스따브로긴의 죄 인정과 고백은 아름답게 비칠 수도 있겠지만 그것조차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는 해석은 여기서 힘을 얻는다. 그는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인정했지만, 그 죄 앞에서 자신이 전적으로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죄라는 것의 정의를 다르게 내리고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하게 만든다. 그에게 있어 죄는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그 무엇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 있어 구원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용서를 구하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죄 고백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게 된다. 구원과 참회로 나아가지 못하는 죄 인정은 결국 자기 안에 갇혀 버리는 결과를 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혹시 그것이 바로 악령에게 사로잡힌 자의 말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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